[경향의 눈]채 상병, 홍범도, 그리고 ‘보수의 정체성’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가 새 지도부의 진용을 갖췄다. 황우여 비대위원장은 지난 3일 취임 일성으로 보수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후 연일 ‘보수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말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 채 상병 순직 10개월
“구명조끼가 그렇게 비싼가요. 얼마나 한다고 구명조끼도 안 입히고 수색을 시키냐고. 이건 살인 아닌가요.” 부모의 절규에 온 국민의 가슴이 미어졌다. 지난해 7월19일 폭우가 쏟아진 경북 예천에서 민간인 수색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해병대 채모 상병(당시 일병·사망 후 추서 진급). 사건 발생 10개월이 지나도록 아직도 수사는 제자리다. 오히려 의혹만 더 커졌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초동 수사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항명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말부터 재판이 진행 중이데,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고발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채 상병 순직 299일 만인 지난 13일에야 처음으로 소환됐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진행 중인 수사와 사법 절차를 좀 믿고 지켜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동안 제대로 수사가 진행됐으면 애초에 특검법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의혹만 커지고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는데 뭘 어떻게 믿고 더 기다리라는 말인가.
지난 14일 시민사회 주최로 열린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 촉구 국민동의청원 개시 선포 기자회견’에서는 채 상병과 함께 급류에 휩쓸렸다 생존한 해병의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가 대독되었다. 어머니는 “지난 10개월 동안 대체 무엇이 진행되었나. 언제까지 기약 없이 고통받아야 한단 말인가. 높은 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젊음을 바친 아들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공감하길 바랐는데 대한민국은 그러지 못했다. 국회의원들이 특검법을 꼭 통과시켜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소방당국은 수중 수색을 만류했다는데, 급류에 장갑차도 철수한 상태에서 티셔츠만 입히고 물속에 들어가라고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왜 구조훈련도 해본 적이 없는 포병 병력을 배치했나, 이 같은 순직 경위와 함께 초동 수사 이후의 수사 외압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보수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특검법 반대 주장은 외칠수록 군색하다.
# 홍범도 흉상 논란 재점화
한쪽에선 한동안 잠잠했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최근 내부적으로 홍 장군 등 육사 충무관 앞에 설치한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을 육사 내부의 다른 장소에서 영구 전시한다는 계획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육사는 지난해 홍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공산당 가입 이력이 있는 홍 장군의 흉상이 생도 교육시설 충무관 입구에 설치돼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홍 장군에게 처음 서훈한 것이 박정희 정부였고, 노태우 정부가 유해 봉환을 시도했으며, 박근혜 정부가 해군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는 등 보수·진보의 이견 없는 독립전쟁의 영웅을 색깔론으로 홀대한다는 역풍이 불었다.
독립유공자 단체들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육사가 홍범도·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충무관 앞에서 옮긴다는 것은 빛나는 독립전쟁의 주역들을 역사의 뒷방으로 치우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광복회는 성명을 내고 “육사 내 독립영웅들의 흉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이전시키려 한다면 차라리 폭파해 없애버리라”고 일갈했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만큼 국군의 토대는 광복군, 독립군에 있다고 봐야 한다. 독립전쟁의 주역들을 지우겠다는 육사의 흉상 재배치는 광복군, 독립군의 오랜 전통 대신, 해방 이후로 좁힌 분절적 역사를 강조하겠다는 의미다. 진정한 보수라면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운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는 오히려 그 맥을 끊으려 한다. ‘반공’과 ‘친일’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협소한 인식이다.
채 상병 순직의 경위와 수사 외압 의혹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독립전쟁의 영웅들은 앞장서서 기려야 한다. 상식적인 국민이 기대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다. 보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병대 예비역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은가. 다시 묻는다. 보수를 자처하는 현 정부와 국민의힘이 지키고자 하는 보수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 so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프고 계속 커지는 켈로이드 흉터··· 구멍내고 얼리면 더 빨리 치료된다
- “남잔데 숙대 지원했다”···교수님이 재워주는 ‘숙면여대’ 대박 비결은
- [스경X이슈] 반성문 소용無, ‘3아웃’ 박상민도 집유인데 김호중은 실형··· ‘괘씸죄’ 통했다
- ‘해를 품은 달’ 배우 송재림 숨진 채 발견
- 윤 대통령 골프 라운딩 논란…“트럼프 외교 준비” 대 “그 시간에 공부를”
- ‘검찰개혁 선봉’ 박은정, 혁신당 탄핵추진위 사임···왜?
- 한동훈 대표와 가족 명의로 수백건…윤 대통령 부부 비판 글의 정체는?
- “그는 사실상 대통령이 아니다” 1인 시국선언한 장학사…교육청은 “법률 위반 검토”
- 3200억대 가상자산 투자리딩 사기조직 체포… 역대 최대 규모
- 머스크가 이끌 ‘정부효율부’는 무엇…정부 부처 아닌 자문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