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화가 1세대’ 윤석남의 ‘그림일기’···동생 윤석구와 2인전

이영경 기자 2024. 5. 1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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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윤석구 남매 최초 2인전 ‘뉴 라이프’
윤석남의 드로잉과 윤석구 대형 조각 함께
어머니·딸·자화상 속 여성의 삶
버려진 물건에 천을 붙여 재탄생
윤석남 ‘내가 기다리는 건’, 2001, Colored pencil on paper, 45×30cm 학고재 제공

“나는 화가였다. 옆에 있는 정물화가 내 작품이다. 지금은 아니다. 보시다시피 허공에 매달려 산다. ‘허공에 매달리기’가 요즈음 내 직업이다…실은 가끔 땅 위에 살짝 내려보지만 멀미 때문에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네에 상반신을 기대고 삐딱하게 서 사과 그림을 노려보는 여성. 그 옆엔 연필로 눌러 쓴 글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85)의 드로잉이다. 윤석남은 2000년 무렵 머릿속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책상에 앉아 드로잉을 시작했다.

“하루에 10장씩 그린 날도 있어요.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일기 같기도 하고 나 자신과 얘기를 나누며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을 풀어주는 것 같았죠. 한 2년은 거의 작업을 안 하고 드로잉을 했어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윤석남이 말했다. 학고재에선 윤석남과 윤석구 남매의 2인전 ‘뉴 라이프’ 전시가 열리고 있다. 두 남매의 2인전이 함께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석남이 2000~2003년 무렵 그린 드로잉 80여 점을 윤석구는 미발표 신작 17점을 함께 전시한다.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윤석남(왼쪽), 윤석구 남매가 2인전 ‘뉴 라이프’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영경 기자

윤석남의 드로잉은 일상의 기록이자 그림으로 그린 시와 같다. 드로잉 속 인물들은 가느다란 줄로 이어진 그네를 타고 허공에 떠 있다. 그네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꿈을 꾸고, 그리운 이를 떠올린다.

“화가는 지상으로부터 20~30㎝ 떠 있어야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도 안 되고 현실에 파묻혀서도 안 되는 중간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또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순간적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그네를 탈 때잖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건 뭘까요. 발 딛고 있는 힘든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 윤석남
윤석남 ‘어느 땅 공포증 환자의 변명’, 2001, Colored pencil on paper, 45×30cm 학고재 제공
윤석남 ‘마술사가 되려다 실패한 아줌마’, 2001, Colored pencil on paper, 45×30cm 학고재 제공

드로잉에 자주 등장하는 건 어머니, 딸, 자신의 모습이다. “서른세 살 장다리 울엄마. 흰 모시적삼 치마 구름같이 차려입고 햇볕 가득한 적막한 운동장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던 그 청청한 모습”의 어머니는 다른 그림에선 작고 가벼워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기 같은 노인이 되기도 한다. 윤석남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어머니”라고 말했다.

일에만 파묻힌 27살 딸을 보며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딸 때문에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27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두손 번쩍 들어 환영”하기도 한다. 머리 위에 밥그릇 12개를 인 모습을 그린 그림엔 “밥그릇 12개로 마술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쉰 살 되는 생일날 깨달았다. ‘마술사가 되려다 실패한 아줌마’”라고 적었다. ‘화가’로서의 삶에 때론 장애물이 됐던 결혼, 육아, 가사노동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주변에서 만난 인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단상까지 드로잉으로 남긴 ‘그림일기’의 내용은 다양하다. 윤석남은 “그릴 당시엔 끄적거리는 낙서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려나가면서 드로잉이 완성된 작품의 전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개별적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석구 ‘A New Life(Man)’, 2019, FRP. cloth, 197×192×42cm, 학고재 제공
윤석구 ‘A New Life(바나나)’, 2019, FRP. cloth, 140×350×150cm, 학고재 제공

8살 터울의 남매 조각가 윤석구(77)는 자전거, 자동차 등 버려진 사물부터 자신의 기존 작품에 각종 천을 붙여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작품들을 선보인다. 버려진 사물에 새생명을 부여해 재탄생시키는 작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체 비례의 모범을 그린 ‘비트루비안 맨’의 모습을 한 남성 모형에 천조각을 붙인 ‘A New Life(남성)’, 고대 비너스 모형에 천조각을 붙인 ‘A New Life(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유전자 조작을 암시하는 대형 과일 모양의 작품 등이 흥미롭다.

윤석남의 드로잉은 윤석구의 대형 조각품에 전시관 중앙을 내어주고 한 발짝 뒤로 슬쩍 물러났다. 윤석남은 “누나 역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생의 작품이 대형 작품이니까 내 작품은 소품이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작품과 소소한 작품이 한 장소에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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