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사냥했다?… 고고학 통념 뒤집기

이창욱 기자 2024. 5.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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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000년 전 안데스산맥의 여성 사냥꾼이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일러스트로 복원했다. Matthew Verdolivo/UC Davis IET Academic Technology Services 제공

'동이 트면 동굴과 움집에서 갓 잠에서 깬 사람들이 나온다. 우리의 선조인 원시인들이다. 남자들은 사냥 도구를 챙겨 먼 길을 나선다. 거주지에 남은 여자들은 아이, 노약자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식물 열매와 뿌리를 채집할 준비를 한다.'

눈을 감고 선사시대를 그려보면 머릿속에 펼쳐지는 광경이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수렵채집 사회는 정말 이런 모습이었을까. 최근 수렵채집 사회에 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연구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러시아 서부에서 발견된 '암냐 유적'의 일부. 붉은색으로 강조된 부분이 8000년 전 수렵채집인이 땅을 파고 거주지를 지었던 자리다. Antiquity/E. Dubovtseva 제공

● 수렵채집 사회는 농경 사회보다 단순했다?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의 광활한 침엽수림 지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에서도 1000km 이상 떨어진 머나먼 곳인 암냐(Amnya)강 부근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요새인 '암냐 요새' 유적이 있다.

1987년에 처음 발견된 이유적은 연대 측정 결과 약 8000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10개 정도의 가옥이 모인 구역 두 개로 이뤄졌다. 암냐 유적의 놀라운 점은 요새를 만든 주인공이 농사를 짓기 이전의 '수렵채집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헤니 피에존카 독일 베를린자유대 선사 고고학연구소 교수팀은 암냐 요새에 관한 연구 결과를 2023년 12월 국제학술지 '앤티퀴티(Antiquity)'에 발표했다. (doi:10.15184/aqy.2023.164)

많은 역사 교과서는 선사시대 인간들이 동물을 사냥하거나 식물의 뿌리, 열매를 채집해 식량을 얻는 '수렵채집 사회'를 이루며 살았다고 설명한다. 식량 자원을 따라 이동하면서 살던 수렵채집인들은 이후 농사를 시작하면서 한곳에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농사로 남는 잉여 자원이 많아지면서 사회는 더 커지고 복잡해졌고 계급이 생기면서 우리가 아는 '문명' 사회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수렵채집, 농경, 정착 생활, 문명의 시작'. 암냐 요새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 흐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유적이다. 요새 주변에서 농사를 지은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위성 이미지, 지상 조사, 탄소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이 거주지의 규모와 사용 기간을 추정했다. 암냐 요새의 정착민들이 농사 대신 적극적으로 식량을 얻은 곳은 유적 주변의 강과 호수였다. 

연구팀은 암냐 요새의 정착민들이 주변 강에서 풍부한 양의 물고기를 잡아 건어물과 생선 기름 등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 식품들은 모두 영양가가 높으며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 유적에서는 또한 엘크, 순록, 비버의 뼈도 발견됐다. 수렵 생활만으로도 정착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농경과 경제 체계는 항상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는 게 아닙니다."

3월 21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는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복잡한 사회와 경제생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 타이가 지대의 여름. 연구자들은 암냐 유적 거주자들이 농사를 짓는 대신 호수와 강에서 풍부한 어류를 사냥해 식량을 모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연구팀은 암냐 요새의 수렵채집인들이 상당히 정교한 사회적 조직을 이루며 살았다는 증거를 찾았다. 그중 하나가 요새 내부의 집을 지키기 위한 벽과 방어용 구조물이다. 예를 들어 요새를 둘러싼 외부 도랑에서는 화살촉이 발견됐다.

유적의 집터와 벽 밑을 파보니 불타버린 검댕이 나왔다. 요새를 둘러싸고 화살을 주고받는 공격과 방어가 이뤄졌으며 가옥과 벽이 화재에 휩싸여 불탔다는 의미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전쟁에 가까운 폭력 사태가 일어났으며 이는 수렵채집 사회를 이룬 집단이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복잡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페루 윌라마야 파트샤 유적에서 발견된 여성 사냥꾼의 무덤. 골격과 함께다양한 사냥 도구가 출토됐다. Randall Haas,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제공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채집했다?

수렵채집 사회에 관한 또 한 가지 고정관념은 남성이 사슴 등의 동물을 사냥하고 여성은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구해왔다는 것이다. 남성이 사냥 등 근력이 필요한 일을 주로 담당했다는 '사냥꾼 인간(Man the Hunter)' 가설과 여성이 채집을 담당했다는 '채집꾼 인간(Woman the Gatherer)' 가설은 수렵채집인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서로 분리돼 있었다고 설명한다. 과연 그랬을까.

2020년 11월 4일 랜달 하스 당시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팀은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의 고산지대인 페루 윌라마야 파트샤 유적에서 9000년 전 묻힌 사냥꾼의 무덤을 발굴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doi: 10.1126/sciadv.abd0310)

치아와 골격 분석을 통해 밝혀진 무덤의 주인은 17~19세의 여성. 그런데 이 무덤에는 돌로 만든 창 촉, 발골 도구 등 대형 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장비가 부장품으로 함께 묻혀있었다.보통 부장품이 생전의 무덤 주인이 쓰던 물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덤의 주인이 여성 사냥꾼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사냥꾼의 부장품 - 여성 사냥꾼의 무덤에서는 생전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다양한 사냥 도구가 발견됐다. 사냥에 쓰였을 뾰족한 촉, 살을 발라내는 발골 도구, 주먹도끼 등이 보인다. Randall Haas,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제공

연구팀은 뼈를 이루고 있는 동위원소를 분석해 무덤의 주인이 고기를 섭취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무덤에 묻힌 여성이 사냥한 고기를 섭취했다는 정황 증거였다. 혹시 이 무덤에 묻힌 여성 사냥꾼만 특이한 경우였던 건 아닐까.

연구팀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약 13만 년 전에서 8000년 전에 만들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고인류 무덤 전체를 조사했다. 그 결과 107개 유적지에서 발견된 429명 중 사냥도구와 함께 묻힌 사람은 27명이었고 그중 11명이 여성이었다. 이 결과를 통해 연구팀은 통계적으로 사냥꾼 중 30~50%가 여성이었다고 계산했다.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실렸다.

과거는 물론 현대의 수렵채집 사회에도 여성은 사냥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2023년 6월 카라 월 셰플러 미국 시애틀패시픽대 생물학과 교수팀은 전 세계 인류학 데이터베이스인 'D-PLACE'를 활용해 전 세계 391개 수렵채집 사회의 자료를 모아 분석한 결과를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에 발표했다. (doi:10.1371/journal.pone.0287101)

391개 사회 중 사냥에 관한 정보가 기록된 곳은 63개였다. 연구팀이 사냥 자료를 분석해 남성과 여성의 참여도를 조사한 결과 79%인 50개 사회에서 여성이 사냥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 70%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꾸준히 의도적으로 사냥 활동에 참여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연구 사례에 대해 "여성의 사냥은 한 번 나타나는 우연이 아니라 수렵채집 사회에서 꾸준히 관찰되는여성의 행동 패턴이라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냥꾼 인간' 학설이 인류학계에 등장한 것은 1966년 학회를 통해서입니다. 이후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계 내부에서는 남성이 사냥하고 여성이 채집한다는 이분법적 생각을버린지 오래됐어요. 그런데 대중 미디어에서는 아직도 그런 생각이 많이 남아있죠." 이 교수는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칼라하리 사막 코마니 지역의 부족 집단인 산족 사냥꾼 아리 래츠가 사냥 자세를 취하고 있다. South African Tourism 제공

● 똑같은 수렵채집 사회는 없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수렵채집 사회를 그려보자. '동이 트면 나무 벽을 둘러친 요새의 집 밖으로 갓 잠에서 깬 사람들이 나온다. 우리의 선조인 원시인들이다. 남녀 사냥꾼들은 사냥 도구를 챙겨 먼 길을 나선다.' 처음에 상상했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수렵채집 사회에 관한 고정관념이 생긴걸까. "그 유래는 19세기 후반인 18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미국의 인류학자였던 루이스 모건은 자신의 저서 '고대사회'에서 원시적인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사회가 진화한다는 생각을 주장했다.

앞서 설명했던 '수렵채집, 농경, 정착 생활, 문명의 시작'이란 구도도 여기서 나와서 발전한 것으로 고도의 인간다운 문화를 갖추기 이전 단계로 수렵채집 사회가 소개된다. 이후 '사냥꾼 인간' 학설이 등장하며 수렵채집 사회란 표현에 '남성이 사냥한다'는 고정 관념까지 붙었다.

이후 약 150년간 인류학 연구가 진행되며 모든 사회의 모습이 이 도식에 맞는 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졌다. 수렵채집 사회지만 거대한 규모의 정착지를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고 여성이 사냥하는 경우도 발견됐으니까. 인류 사회가 기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탄자니아의 하자베족 여성이 사냥으로 잡은 새를 들어보이고 있다. 최근 연구를 통해 여성 사냥꾼에 관한 인식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A_Peach(W) 제공

이 교수는 실제로 최근 학계에서는 '수렵채집 사회(Huntergatherer society)'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수렵채집 사회라 불리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회가 각기 다른 모습이어서 수렵채집 사회라는 표현이 나타내거나 설명하려는 대상이 갈수록 더 불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 인류학계에서는 사냥과 채집이 명확히 나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hunter-gatherer'이란 표현 대신 '음식을 모으다'라는 뜻의 동사 'foraging'을 쓰는 'foraging society'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이는 추세입니다."

학계에서 수십 년 전에 부정당한 '사냥꾼 인간'과 같은 이론이 대중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이 이론과 사회의 고정관념이 잘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교수는 최근 여성 사냥꾼에 관한 칼럼을 한 시사 잡지에 게재했다가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채집했다는 기본 상식도 모르면서 무슨 학자냐'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류의 진화에 관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연구 중에서는30~40년 전에 만들어져 현재는 설득력을 잃은 가설도 많습니다. 학계와 대중이 함께 이런 오해를 벗을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관련기사
과학동아 5월호, 여성 사냥꾼, 복잡한 수렵채집 사회… 고고학 통념 뒤집기
 

[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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