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가서 시다나 해라” 떠밀리듯 간 미싱은 ‘천직’이었다 [영상]

채반석 기자 2024. 5. 1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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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50)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3일 만에 '미싱'(재봉틀)에 푹 빠져버렸다.

남편은 옷 한장당 공임(작업비)을 50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옷가게 사장들과 싸웠고, 아내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미싱을 돌렸다.

일감은 줄고 경쟁은 치열하다 보니 봉제사(미싱사)가 한벌당 받는 보수(신사복 상의 기준)는 1997년 7300원에서 현재 9천원대로, 겨우 2천원 정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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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기획-다큐로 보는 6411]
신성남·노재관 부부에게 봉제란
반바지를 만드는 신성남씨.
0515 1면 문패
고 노회찬 의원이 찾았던 6411번 새벽버스에는 청소, 돌봄 노동자 등 ‘엄연히 존재하지만 사회적 발언권은 없는’ 우리 사회 숨은 노동의 주인공들이 함께했다. 이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온 ‘6411의 목소리’가 연재 100회를 맞았다. 이에 노회찬재단과 한겨레는 ‘영상판 6411의 목소리’랄 수 있는 노동다큐 ‘툴툴(TOOL TOOL): 우리는 모두 프로다’를 시작한다. 그 첫 두 편의 이야기를 온라인과 지면을 통해 글과 사진으로 소개한다.

신성남(50)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백화점에서 옷도 팔았고, 경리 일도 해봤고, 호프집에서 카운터도 봤지만 매번 일주일도 넘기지 못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재미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켜보던 엄마는 “그러지 말고 공장 가서 시다(조수)나 하라”고 말했다. 신씨는 으레 그랬듯, 이번에도 관둘 계획으로 ‘잠바집’에 취직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살이었다. 하지만 3일 만에 ‘미싱’(재봉틀)에 푹 빠져버렸다.

‘미싱’ 수입은 점점 뒤로만 간다

“처음엔 아까운 천을 왜 조각조각 낼까 생각했는데, 2~3일 일하다 보니까 (도안대로) 그려진 원단이 옷이 된다는 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이건 나의 천직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남편 노재관(52)을 만난 곳도 봉제공장이었다. 노씨는 중학교 졸업 후 고향 형님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왔다.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 시다 3년, 미싱 보조 2년을 거쳐 미싱사가 된 뒤에는 재단을 배웠다. 재단 보조로 1년6개월을 일하고 나서야 재단사가 됐다.

공장에서 만난 둘은 1996년 결혼했고, 1999년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봉제공장을 차렸다. 남편은 옷가게에서 일감을 받아오고, 원단을 재단하는 일을 맡았다. 아내는 미싱 앞에 앉았다. 힘든 시절이었다. 남편은 옷 한장당 공임(작업비)을 50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옷가게 사장들과 싸웠고, 아내는 거의 매일 밤 11시까지 미싱을 돌렸다. 아내는 미싱 바늘에 찔려 손가락을 크게 다친 적도 있다. 그렇게 아이 둘을 키워냈다.

“애가 유치원 갔다 오면 그래도 엄마랑 놀겠다고 먼지 나는 미싱방에 와요. 조잘조잘하다가 꼬박꼬박 졸아요. ‘방에 가서 자’라고 하면 엄마랑 있겠다고 하니까, 미싱 옆에 원단을 깔아놓고 ‘여기서 자’라고 했어요.”

아이들을 다 키워낸 지금은 그때만큼 일하지 않는다. 오후 5시 반이면 퇴근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일감이 저임금의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대거 옮겨갔기 때문이다. 1억3천만원이던 연평균 매출은 지난해 1억원 아래로 떨어졌다. 공장 월세와 부자재 비용을 빼면 부부가 가져가는 수익은 훨씬 적다. 코로나19 유행 때 직원 두명을 내보냈고, 지금은 부부만 남았다.

봉제공장에서 만나 결혼한 뒤 함께 봉제공장을 운영 중인 신성남(오른쪽)·노재관 부부.

경력 30년 숙련공 월평균 238만원

부부 공장만의 일이 아니다. 일감과 함께 봉제노동자도 빠르게 줄어들면서 머잖아 봉제업이 소멸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통계청의 ‘봉제업체 실태조사’에 따르면 통계가 처음 만들어진 2009년 14만4116명이던 봉제노동자 수는 2021년 12만999명으로, 2만3천명 넘게 감소했다. 봉제업체 규모도 점점 영세해지고 있다. 신씨는 “업계 사람들 다 언니고 오빠뿐”이라며 “우리 나이대가 끝이고 밑으로는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는 신씨 부부와 달리 대부분 봉제노동자는 제작한 제품 수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객공’으로 일한다. 일감은 줄고 경쟁은 치열하다 보니 봉제사(미싱사)가 한벌당 받는 보수(신사복 상의 기준)는 1997년 7300원에서 현재 9천원대로, 겨우 2천원 정도 올랐다.

“공정임금·4대보험 지원 등 봉제업 지원 대책을”

실제 통계청이 2022년 12월 봉제업체 중 의류봉제업체 441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봉제사 숙련공은 월평균 238만원, 스웨터를 제작하는 링킹사 숙련공은 260만원을 벌었다. 경력이 30년, 40년 쌓여도 임금은 제자리다. 도리어 노동시간만 길어지고 있다. 이정기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서울봉제인지회장은 “공정임금, 4대 보험 일부 지원, 비수기 실업수당과 같은 봉제업 지원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사진 채반석 서보미 기자 chaib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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