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틀렸다, 석굴암 창건은 706~711년 사이 신라 성덕왕 때”

허윤희 기자 2024. 5.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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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前 국립중앙박물관장
삼국유사 기록 문제점 지적
국립춘천박물관 심포지엄서 발표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석굴암. 삼국유사 기록을 토대로 750년쯤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신라 33대 성덕왕 대인 706년에서 711년 사이에 창건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한석홍 사진작가가 찍은 석굴암 내부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원

경주 석굴암은 서기 750년쯤 신라 35대 경덕왕 대에 재상을 지낸 김대성(700~774)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기록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에 ‘김대성이 현세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석굴암이 20세기 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후 종교학·미술사학·역사학 등 인문과학뿐 아니라 건축학·수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유독 석굴암의 조성 시기에 대해선 별다른 의심 없이 이 기록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두고 석굴암 조성 시기를 최소 40년 앞당겨 봐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불교조각 연구자인 민병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4일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다시 찾은 빛: 선림원 터 금동보살입상’ 국제 학술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석굴암은 750년경 김대성이 창건한 게 아니라 706년에서 711년 사이에 신라 33대 성덕왕대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750년 제작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석굴암 본존불. 사진작가 한석홍이 촬영한 사진이다. /국립문화재연구원

먼저 삼국유사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경주 모량리에서 어떤 여인이 아들 대성과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모자는 보시를 하면 만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승려의 말을 믿고 생계의 유일한 밑천인 밭을 승려에게 시주했다. 얼마 후 대성은 죽었고,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아들로 환생했다. 장성한 대성은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건립했다. 석굴암을 조성하려고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실의 뚜껑을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쪽으로 깨졌다. 대성이 분해하다가 잠들었더니,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민 전 관장은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인 13세기에 승려 일연이 썼고 석굴암 창건에 대한 내용은 당시 경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 ‘향전’에서 발췌한 것으로 극히 일부의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했던 인물·사물에 가공의 내용을 덧붙여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라며 세 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①당시 중국과 일본 등 불상 양식의 전개 과정 ②현존하는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 ③동아시아에서 팔부중, 금강역사, 사천왕, 제석천, 범천, 10대 제자로 이루어진 소위 석가 정토 구현의 유행 시기 등과 비교 검토를 해보면 710년쯤 창건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왼쪽은 중국 산시성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좌상(710년), 오른쪽은 일본 나라 야쿠시지 금동약사여래좌상(718년경). /민병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민 전 관장은 “석굴암 본존불은 중국, 일본 불상과 비교하면 8세기 전반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며 중국 산시성(山西省) 루이청현에서 출토된 석가여래좌상(703년), 석조여래좌상(710년)과 일본 나라 야쿠시지(藥師寺) 금당 금동약사여래좌상(718년경) 등을 예로 들었다. “석굴암 본존상을 이 불상들과 비교해 보면 얼굴과 가슴의 비만도, 옷주름의 경직성 등을 볼 때 대략 703년과 710년 사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 “통일신라 불상 중 명문에 의해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황복사지 금제여래좌상(706년)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719년)을 보면, 손 모양과 대좌를 덮고 내려오는 옷의 형식, 사실적인 옷주름 등 중국의 동시대 불상과 비교해도 시차가 거의 없이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며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동아시아 삼국의 교류는 매우 활발했고, 성덕왕(재위 702~737) 때는 견당사를 46회나 파견하는 등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唐)의 불상 양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통일신라에 전해졌다고 봐야 한다. 8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의 불상 양식을 비교해봐도 시대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다”고 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국보 금제여래좌상(706년). /민병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719년). /국립중앙박물관

석굴암은 석가 정토 세계를 온전히 구현해 놓은 불교 조각이다. 민 전 관장은 “일본에서도 석굴암처럼 팔부중, 사천왕, 제석천, 범천, 10대 제자 등을 조성해 석가 정토를 적극적으로 구현한 시기는 740년경까지다. 이후엔 화엄 사상이 유행하면서 불교 조각의 흐름이 바뀐다”면서 “불교를 일본에 전해준 한반도에서 석가 정토를 구현한 불교 조각이 일본보다 뒤늦게 조성됐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석굴암 조성 시기는 중국과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성덕왕 대로 ‘향전’에 이름이 등장하는 김문량이 재상을 지냈던 서기 706년에서 711년 사이에 제작됐을 것”이라며 “아버지 김문량은 석굴암을, 아들 김대성은 불국사를 짓는 데 깊이 관여했고, 이것이 후대에 각색돼 ‘향전’에 전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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