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읽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한겨레 2024. 5. 14. 19: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유할수록 책을 많이 읽고, 가난할수록 책에서 멀어진다. 공공도서관, 서점이 부족한 지방도 책에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독서를 순전히 개인적 행위로 간주하고 책을 시장에 맡기면 이런 불평등을 교정할 길이 없다. 공공도서관과 지역서점을 포함한 독서생태계 형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밤 열두시에 문 닫는 거는 인자 고마하입시더. 그 시간에 누가 온다꼬.” 어머니는 애절했다. “안 돼요. 책방을 열어둬야 길이 환하지. 책 사는 학생들도 있고.” 아버지는 단호했다. “새벽 여섯시부터 밤 열두시까지 말이 됩니꺼? 사람 쫌 삽시더.” 책방 영업시간을 두고 부모님은 곧잘 다퉜다. 나는 늘 어머니 편이었지만, 아버지는 완강했다. 두 분은 그렇게 오랫동안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근골격계 질환으로 꽤 고생하셨다.

우리 집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년간 학교 앞에서 동네책방을 했다. 책이 잘 팔리던 시절이었다. 많이 벌었을까? 도매상이 주는 공급률이 정가의 70% 정도인데, 경쟁이 붙어 할인에 책 꺼풀 포장까지 해줬다. 서적상 조합이 할인폭을 제한한 게 15%였다. 무급 가내종사자 노릇 하며 정산도 꽤 했으니 사정을 안다. 극악의 이익률을 보상하려면 뼈를 깎는 장시간 노동밖에 답이 없었다.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역서점에 한해 도서정가제 폐지를 입법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 기억이 떠올랐다.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 악화를 낳는 3대 규제 중 하나로 도서정가제를 지목하자 담당 부처가 나섰다고. 정가의 60%에 책을 공급받는 인터넷서점, 대형서점에 대해 70%에 공급받는 작은 서점들이 할인 공세로 맞서란다. 지금도 10% 할인에 적립 5%를 허용하고 있으니 실제로는 정가제가 아니라 15% 할인제다. 조합이 15%로 할인을 제한하던 30~40년 전보다 못한 수준으로 돌아가 유혈 경쟁을 벌이라는 정부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경쟁 제한 탓에 책값이 비싸지니 경쟁을 강화하면 책값은 싸지고 책은 많이 팔릴 것이라는 논리다. 지역서점 종사자들의 과로나 몰락은 안타깝지만 최적 균형 찾기 과정의 불가피한 고통으로 보자는 말이다. 비용 최소화,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책 ‘소비자’의 입장이겠다. 독서생태계의 일원인 ‘독자’의 입장은 아니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 서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싸고 좋은 것 찾기는 인지상정이다. 다만 책 유통이 무한경쟁에 맡겨졌을 때 소비자의 효용이 극대화될지는 따져볼 일이다. 한국 사회는 자유경쟁 시장에서 책이 어떤 운명을 겪는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성행한 덤핑판매, 외판, 할부 같은 출혈경쟁들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 동대문을 중심으로 덤핑서적상이 100곳을 넘었다. 형편이 어려운 출판사에서 지형을 헐값에 사와 싼값에 책을 찍어 풀었다. 월부와 외판 같은 무리한 책 판매 관행도 횡행했다. 정상 경로로 책을 취급하던 출판사와 서점들이 대거 파산했다. 그때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출판산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떠올려 보자. 지금은 그때와 달리 ‘출판사-도매상-서점-독자’의 유통체계가 확립되어 있다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그조차 매우 위태롭지만 책값 인상 후 할인폭 확대 등 온갖 편법이 예상되는 것은 물론이다.

책의 유통을 시장경쟁에 맡겨야 한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공공도서관, 학교도서관 폐지 운동이다. 도서정가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막대한 비용이 책 구입, 인건비, 도서관 건립과 유지, 프로그램 운영 등에 투입되고 있다. 모두 세금이다. 정부의 직접 개입으로 시장질서를 붕괴시키고 있는 현장은 놓아둔 채, 구멍가게 수준의 도서정가제를 공격하는 것은 주객전도라 하겠다. 모든 공공도서관을 폐지하면 좋은 책이 더 싼값에 공급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취지에 맞는다.

도서관은 책이 담고 있는 지식, 정보,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될 때 더 큰 가치를 낳는다는 믿음에 기반한 제도다. 서점이 도서관을 불공정 경쟁자라며 고발하기는커녕 적극 협력하는 이유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참가하고 있는 독서동아리는 동네책방에서 모이지만 공공도서관 소속이다. 원래 도서관 동아리였는데 직원들 퇴근 시간 넘기기 일쑤라 몇년 전 책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지금도 곧잘 도서관과 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리는 사람들이 서점에서 책도 많이 산다. 독서생태계 속 독자의 모습이다.

책읽기의 공적 가치란 어떤 것일까? 이를테면 독서가 동영상 시청보다 인지능력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갈수록 힘을 얻기 어려운 주장이다. 마치 순수예술이 상업예술보다 더 가치 있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처럼. 하지만 불평등 문제로 접근하면 다르다. 얼마 전 발표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월소득 500만원 이상 고소득층의 독서율은 54.7%인 반면, 200만원 이하 저소득층의 독서율은 9.8%에 그쳤다. 부유할수록 책을 많이 읽고, 가난할수록 책에서 멀어진다. 공공도서관, 서점이 부족한 지방도 책에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독서를 순전히 개인적 행위로 간주하고 책을 시장에 맡기면 이런 불평등을 교정할 길이 없다. 공공도서관과 지역서점을 포함한 독서생태계 형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0여년 전 동네 독서동아리에 처음 참가했을 때가 기억난다. 책을 안 읽고 온 사람일수록 말이 많았다. “책은 안 읽었지만요” 하고 시작하면 어김없이 맥락 없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살기 힘든데 말할 기회를 만났으니 오죽했을까? 일종의 성장통이었던 듯하다. 읽고 말하는 법을, 묻고 듣는 법을 서로 배워나갔다. 책 속 지식만 배운 게 아니라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법을 익혔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법, 차이를 알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이 문제인 시대다. 각자도생 무한경쟁 속 한국인들은 더 외롭다. 외로운 개인들이 뭉치면 분노한 ‘진영’이 된다. 혼자서는 외롭고 뭉치면 분노하는 게 지금의 한국인이다. 책읽기 모임, 책방, 도서관 따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해법은 책 너머의 문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책 밖에도 진리가 있다.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생태계 형성이 중요한 이유다. 외롭고 약한 이들이 함께 읽으면 좋다. 묻고 듣는 법을 배우면 즐겁다. 싼 책을 읽으면 즐겁지 않겠냐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같이 읽는 책이 더 즐겁지 않겠냐고.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