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려 했는데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네요”

최재봉 기자 2024. 5. 1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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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8년 만에 새 시집 낸 도종환 시인
도종환 시인이 14일 기자간담회에서 기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창비 제공

“무엇 하다 왔는고?/ 시 쓰다 왔습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좀 바꾸었나?/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습니다”

도종환 시인이 새로 낸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창비)에 실린 작품 ‘심고’(心告)의 시작 부분이다. 심고란 천도교에서 교인들이 한울님께 마음으로 고하는 일을 가리킨다. 천도교의 가르침을 빌려 시와 정치를 오간 자신의 처신을 돌이켜 본 작품으로 읽힌다.

이달 30일 제22대 국회 개원에 맞추어 12년 간의 의정 활동을 일단 마감하게 된 도종환 의원이 12번째 신작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펴냈다. 지난 3월 말로 500권째를 기록한 창비시선의 제501번째 책이자, 도 의원 자신의 시집으로는 ‘사월 바다’(2016) 이후 8년 만이다. 올해는 그가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 활동을 시작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여러 의미가 겹쳤다. 마무리와 새 출발이 포개지는 시점에 신작 시집을 낸 그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기자간담회를 마련했다.

“12년 간 의회에서 일하는 동안 늘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너는 왜 거기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라일락 꽃도 4월이 불러서 거기 있는 것인데, 저는 누구의 무슨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와 있는가 하는 자문이었지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때도 있었고 찾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대답을 찾지 못했을 때 저를 찾아온 고뇌의 흔적들이 이 시집에 담겼습니다.”

라일락 이야기는 짧은 시로도 써서 이번 시집에 실렸다.

“라일락은 왜 거기 있을까// 사월이/ 간절하게 불러서/ 거기 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라일락’ 전문)

시기도 그러하지만, 이번 시집의 커다란 주제가 시인 자신의 정치 참여에 대한 회고와 성찰인 것으로 보인다. ‘속유’(俗儒)나 ‘사림’(士林), ‘사의재’(四宜齋) 같은 시들에서는 옛시절 권문에 들었던 선비들의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의정 생활이 이룬 것과 놓친 것을 돌아보고 있다.

“권력을 지키지 못한 죄가 크다/ 대왕의 개혁 권력이 무너진 뒤 정국은/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다”(‘사의재’), “옳게 공부한 이들이 집권을 하고/ 수십년의 시간과 기회를 주었는데도/ 나라가 괴멸되다시피 한 까닭”(‘사림’) 같은 구절들은 몇백 년 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린다.

“아수라장 같은 정치판에 들어가 일하면서, 거기서 지냈던 시간들과 고뇌의 흔적을 어떤 문장으로 담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옛사람들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북송 시대 학자 정이천을 칭송한 문장으로 ‘가을 물 같이 차고 맑은 문장은 흙먼지에 물들지 않는다’(秋水文章不染塵)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추사 선생이 쓴 글씨로 남아 있기도 하죠. 거칠고 살벌한 정치판에서 겪는 일들을 어떻게 가을 물 같이 차고 맑은 문장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국회에서 보낸 12년 중에서 그나마 시와 만나는 시간이 영성을 회복하는 시간, 먼지 속에서 먼지를 물리치는 시간이었습니다.”

12년 의정 활동 일단 마감하며
정치 참여 회고와 성찰 큰 주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펴내
올해는 시인 등단 40년 되는 해

“우리 사회 가장 큰 문제 양극화
양극단서 돌아와 상대방 말 경청을
예술인고용보험 도입 가장 보람”

시인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고민에서는 문인이나 정치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영향을 주어서 세상을 바꾸려 하고, 정치는 정책과 예산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방법이 다를 뿐”이라며 “만약 후배 문인 중에 누군가가 국회에 들어가겠다면 들어가되 가서 자리나 권력을 탐하지 말고 문화예술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라고 조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원으로 있는 동안 예술인 고용보험제도를 만들어서 예술인 21만명이 굶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한 것”을 보람으로 꼽으며, “문학·출판과 영화 등을 좌파가 장악했다는 편견으로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한 이 정부에 맞서 누군가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가서 깎인 예산을 복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도종환 시인. 창비 제공

시집 제목은 균형과 조화가 깨진 채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을 담았다.

“정오는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고, 균형과 조화가 잡힌 시간입니다. 그 정오에서 멀어졌다는 건 그런 균형과 조화가 깨진 어둡고 살벌한 죽음의 시간이라는 뜻이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입니다. 경제적 양극화도 문제고, 정서의 양극화 역시 매우 힘든 문제입니다. 이런 양극화로 인해 깨진 균형과 고요를 되찾는 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양극단에서 되돌아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내면의 짐승들을 꺼내 놓고 점점 더 거칠고 사나운 시간을 살아간 끝에 결국 멸망을 맞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시집 제목에 담고자 했습니다.”

바쁜 의정 생활 중에도 시를 놓지 않았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매달 ‘책 읽는 의원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는 그는 시집에 이어 ‘너는 왜 거기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산문집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겨레 연재를 거쳐 2011년에 책으로 낸 자전 에세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가 의정 활동을 하기 전까지의 제 삶과 문학을 정리한 책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에세이를 쓸 생각입니다. 2012년에 처음 등원하는데 여러 축하 화분 중에 근조 화분이 있더군요. 시인으로서 너는 죽었다, 라는 뜻이었겠죠. 그 화분을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물을 주고 가꾸고 있는데, 국회에서 나올 때도 가지고 올 생각입니다. 그 난 화분을 보며 시인으로서 나는 죽은 것인가, 끝난 것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해 왔고 앞으로도 하고자 합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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