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싫었다”... 전교 1등이 공대 간 이유

김용 2024. 5. 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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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헬스앤]
산부인과는 매년 전공의 모집 때 미달이 속출한다. 이제는 분만 담당 대학교수 요원까지 미달 현상이 번지고 있어 우려를 사고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항상 대기 상태로 생활하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보고 의대 진학을 포기했어요. 임신부를 극진히 돌보는 의사 아버지는 존경했지만..."

고교를 수석 졸업한 60대 A씨는 아버지의 의대 진학 권유를 뿌리치고 공대(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물리학과, 전자공학과는 의대보다 커트라인이 높았고 인기 절정이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는 장남인 A씨에게 자신의 뒤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A씨도 한때 의사를 희망했었다. 하지만 거의 휴일 없이 임신부를 돌보는 아버지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며 공대 진학을 결정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며 CEO까지 지냈다.

A씨는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제공했지만, 본인의 삶은 혹독했다"고 회고했다. 과거 산부인과는 의대 상위권이 지망하는 과였다.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는 우수 의대생들의 집합소였다. 하지만 저출산 현상이 부각되기 이전에도 산부인과 의사의 삶은 고단했다. 지금처럼 '필수 의료' 분야의 의사 부족이 두드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예고없이 산통을 느끼는 임신부를 돌봐야 하는 직업 여건 상 삶의 질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내 환자는 내가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막중했다.

갈수록 줄고 있는 분만 담당 의사... 후배 육성할 교수 요원도 사라진다

최근 국내 대표 대형병원에서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전임의가 한 명도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임의는 전공의 과정을 마친 전문의로 병원에서 다시 세부 전공을 이수하며 진료하는 의사다. 주로 교수가 되기 위해 전임의 과정을 밟는다. 이 병원은 최근 2년간 산과 전임의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산부인과는 매년 전공의 모집 때도 미달이 속출한다. 이제는 분만 담당 대학교수 요원까지 미달 현상이 번진 것이다. 최근 고령 분만이 많아 위험에 노출되는 임신부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분만 의사를 육성하는 교수 요원마저 사라지고 있다. 분만을 가르칠 사람도, 배울 사람도 없는 상황이다.

산부인과를 선택해도 분만은 기피 분야다. 잦은 응급 상황에 항상 소송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보상은 턱없이 적다. 개원도 힘들다. 간혹 보이는 동네 산부인과는 '분만은 안 되는' 여성 전문 병원이다. 이제 '분만이 가능한' 동네 산부인과는 거의 사라졌다. 지금도 남아 있다면 병원 운영이 힘들 것이다. 사례에 나온 A씨 아버지는 본인은 힘들어도 가족의 삶은 풍족했는데, 지금은 가족도 생활의 여유가 없을 것이다.

오늘도 가족 여행 꿈꾸지만...밤이나 주말에도 대기가 일상

의사가 진료·수술 후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는 돈(의료수가)은 오랜 불만 사항이다. 특히 고위험 수술이 많은 분만의 경우 여러 명의 의료진이 동원되어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다. 대학 병원은 상급 종합병원 지정 유지를 위해 분만실은 운영해도 인건비를 아끼려는 기조가 있다. 산과 교수는 격무의 연속이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쉬는 날에도 병원에 나와야 한다. 밤이나 주말에도 대기하는 경우가 잦다. 가족들과 먼 거리 여행은 꿈도 못 꾼다.

고령 산모가 늘어 분만 위험도 커지면서 소송 부담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분만 사고 때 의사의 무과실이 입증되면 국가가 전액을 보상하지만 입증이 쉽지 않아 소송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배상액이 10억원이 넘는 사례가 있어 산과 기피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젊은 의사들의 산과 기피 심화... "휴일에는 응급 호출 없기를"

분만 담당 의사가 갈수록 줄고 있어 저출산 현상이 해소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저출산을 국가위기 상황으로 규정하고 부총리급 저출산부 신설을 예고했다. 국가 역량이 총동원되어 저출산 문제가 나아지면 지금도 부족한 분만 담당 의사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들 중 은퇴가 가까운 사람들이 많다. 젊은 의사들의 산과 기피가 더 심해지면 은퇴 의사들의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

분만이나 심장-뇌혈관 수술의 경우 기존의 의료수가 시스템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국가가 보상하는 방안을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 분만 의사들이 원활한 로테이션을 통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의사 수를 크게 늘려야 한다. 모두 현재의 의료수가 시스템으론 거의 불가능한 정책들이다. 특단의 상황에선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분만 사고의 경우 소송 부담을 덜어주는 국가 보증제도 필요하다.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의대 정원 문제가 여전히 해법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산부인과, 외과, 흉부외과 등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살리기가 주 목적인데 동력이 떨어질까 걱정도 된다. 교대할 의사가 부족해 병원 근처에서 사는 필수의료 의사들이 적지 않다. 모처럼 가족과 쉬는 날에도 응급 호출에 신경 쓰는 고단한 삶만은 해소됐으면 좋겠다.

김용 기자 (ecok@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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