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 뚫고 성장하는 여성 감독들의 장르 도전
15일 개봉하는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열쇳말 중 하나인 ‘관종’과 관음(훔쳐보기)의 비틀린 관계가 만들어내는 파국을 그린 스릴러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과감한 구성과 시종 탄탄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르극으로 언론 공개 이후 호평이 쏟아졌다.
장르적 세공력이 남다른 이 영화는 1989년생 김세휘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김 감독은 ‘맨홀’ ‘치외법권’ ‘인천상륙작전’ ‘덕구’ 등에서 10년 동안 스크립터로 경력을 쌓아온 여성 감독이다. 지난 1월 개봉해 관객 170만명을 넘긴 ‘시민 덕희’의 박영주 감독,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의 김희진 감독 등 올해 들어 상업 장르 영화에서 여성 감독들이 약진하고 있다. 특히 장르영화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여성감독들에게 문이 좁았던 범죄, 스릴러에서 성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 3월 영화진흥위원회가 내놓은 ‘2023년 한국 영화 성인지 결산’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개봉한 제작비 30억원 이상 상업영화 가운데 여성 감독의 작품은 임순례 감독의 ‘교섭’이 유일했다. 한국영화의 성과가 질적·양적으로 정점을 찍은 2019년에 5명까지 늘었던 상업영화 여성 감독이 코로나와 함께 다시 쪼그라들면서 영진위는 “최근 몇 년간 독립·예술 영화에서 여성 감독 활약이 돋보이는 것에 비해 고예산·상업 영화에 참여하는 인력의 성비 불균형은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손익분기점 150만명으로 ‘시민 덕희’와 비슷한 수준인 제작비 70억원(추산) 규모의 영화다. 스릴러는 이런 중급 예산의 상업영화에 적합한 장르로 여겨지지만 여성 감독들에게는 특히 문턱이 높았다. 범죄나 액션 등 스릴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남성 영역이라는 오랜 편견이 작용해온 탓이다. 지금까지 스릴러에 도전한 여성 감독은 ‘미씽: 사라진 여자’ ‘탐정: 리턴즈’의 이언희 감독, ‘침입자’의 손원평 감독, ‘돈’의 박누리 감독 등 극소수다.
김 감독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를 가장 존경한다”며 “어릴 때부터 장르물을 좋아했고 앞으로도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2019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심사위원을 했던 신유경 영화인 대표는 “당시 출품작의 상당수와 모든 수상작이 여성 감독 작품이었는데, 단편임에도 무거운 주제의식보다는 재기발랄한 상업영화적 감각이 녹아있는 작품들이 많았다”며 “최근 티브이 드라마 장르물에서는 이미 여성 연출자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영화와 드라마의 플랫폼 간 장벽이 사라지면서 영화에서도 여성 감독들의 장르적 성취가 더 다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 덕희’나 ‘그녀가 죽었다’가 여느 스릴러 영화보다 호평받는 이유 중 하나는 진보한 여성 캐릭터다. 여성은 희생자이거나 평면적인 악역 또는 남성의 보조적인 캐릭터로 소비되곤 했던 기존 스릴러 장르물과 가장 다른 지점이다. ‘그녀가 죽었다’의 주인공 한소라(신혜선)는 악당이지만 근사한 삶과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에 대한 보편적 욕망이 투영된 입체적 인물이다. 사건을 추적해가는 오영주(이엘) 역시 기존 형사물에서 보기 힘든 현실성을 지니면서도 남성 중심 조직에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인물이다. 김 감독은 “형사라고 해서 너무 남성적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팀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한 건이 필요한, 실적을 올리고 싶어하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상업영화 영역에서 여성 감독들의 활약은 커지겠지만 지속 가능성과 특화된 브랜드의 개발이라는 점에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여성 감독으로는 처음 150억원 규모의 대작 영화 ‘교섭’을 연출했던 임순례 감독은 “남성 감독의 경우 사극, 스릴러, 액션 등 특정 장르의 감독 브랜드화가 정착된 데 비해 상업영화계에서 여성들이 막 도약하던 시점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지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영화산업이 양극화되면서 견고한 흥행 포트폴리오를 쌓지 못한 여성 감독들에게 다소 불리한 시장이 이어지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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