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역에 맞춰 신은 신발들... ‘62년 연기 인생’이 이 안에

유석재 기자 2024. 5.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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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51] 연극배우 박정자

62년이 흘렀다. 박정자(82)가 처음 무대에 선 1962년으로부터다. 이화여대 2학년 박정자는 그리스 신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아내인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 이후 그의 삶은 한국 연극사(史)와 궤적을 함께했다. 인터뷰 제안에 “내게 남은 게 뭐가 있더라…”라며 고민하더니 “그저 신발 몇 켤레가 거의 전부”라고 했다. 얼마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했다.

연극배우 박정자가 서울 아르코예술기록원에서 기증품인 신발들을 꺼내 그 앞에 앉았다. 맨 오른쪽이 '그 여자, 억척어멈'의 군화, 왼쪽으로 한 켤레 건너 '19 그리고 80'의 신발, '피의 결혼'의 짚신, '페드라'의 샌들, 그 뒤가 '엄마는 오십에…'의 신발이다. 박정자가 신은 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신었던 구두다. /이태경 기자

◇인생의 압축판, 무대 위 신발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배역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 뭔지 아세요? 바로 신발입니다.” 보폭과 몸무게부터 성격까지 캐릭터를 표현하는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의상 디자이너나 소품 담당자가 아닌데도, 박정자는 늘 대본을 받자마자 이태원과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신발을 직접 고르고 때론 수선까지 맡아 했다.

최근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목줄을 맨 짐꾼 ‘럭키’였다. 아무도 이 배역을 박정자가 맡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채찍을 맞아 가며 맥락 없는 듯 철학적인 대사를 줄줄 읊으며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 캐릭터를 위해 박정자는 반 고흐 작품에 나오는 듯한 낡은 구두를 골랐다. 무척 무거웠다. 절뚝거리는 연기를 하며 신발 밑창이 무대 바닥에 닿을 때 발이 짝짝 붙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비로소 그 캐릭터를 완성시켰다고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8~9분에 달하는 유장한 대사를 끝내자 객석에서 “부라보!”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아르코예술기록원 수장고 상자를 열어 죄다 꺼내 본 그의 무대용 신발들은 지난 연극사의 자취와 열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김정옥 작·연출 모노드라마 ‘그 여자, 억척어멈’(1997)에서 신은 군화는 전쟁을 겪으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성을 표현했다. ‘19 그리고 80′(해롤드와 모드·2003~2021)에서 직접 방울을 만들어 달았던 신발은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했다.

‘페드라’(1999)에서 신었던 굽 높은 샌들은 발이 너무 아플 지경이었으나 주인공의 강렬한 광기를 표출했고,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1991~2010)의 단아한 신발은 평범한 어머니의 소박함을 드러냈다. 가르시아 로르카의 원작을 한국의 굿판으로 번안한 ‘피의 결혼’(1982)의 짚신은 무대예술가 이병복(1926~2017)이 만들어 준 것이다. 어느 신발을 신느냐에 따라 걸음걸이도 연기도 달라졌다.

그 숱한 연극들의 막은 내렸어도 배역의 영혼을 담은 듯한 신발들은 남았다. 박정자는 “누가 사람 신발까지 유심히 보겠느냐고? 그런 눈 밝고 행복한 관객들은 늘 있었다”고 했다.

◇위기를 극복해 낸 ‘위기의 여자’

기록원엔 박정자의 자필 메모가 적힌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의 대본도 소장돼 있다. ‘코트 입고 랑베르에게’ ‘라이터 켜서 담뱃불’ 같은 구체적인 행동과 동선을 붉은색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적었다. 암전(暗轉), 침묵, 몸짓과 대사로 이어지는 무대 위 마술 같은 디테일은 어린 박정자의 꿈이었다. 여덟 살, 6·25가 나기 직전 봤던 연극 ‘원술랑’이 내면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박정자의 자필 메모가 적힌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와 '위기의 여자'의 대본.

‘너무 개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때론 주연에서 밀려나기도 했던 박정자를 유명 인사로 만든 작품은 극단 산울림이 1986년 막을 올린 ‘위기의 여자’였다. 모범적인 듯 보이는 부부 사이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균열을 다룬 연극이었다. 연출가 임영웅(1934~2024)이 박정자에게 “주인공 맡을 배우 좀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는 또박또박 말했다. “위기의 여자, 박정자는 안 되나요?” 주연을 맡은 그는 강렬한 에너지를 대폭 낮추고 섬세함으로 무대를 채웠다. ‘위기의 여자’는 6개월 동안 250회 공연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소극장이 주부 관객으로 넘쳐나는 희한한 사건을 매스컴이 여러 차례 보도했다. 일정이 너무나 바빠 “박정자가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탄식할 만큼 연극 인생에서 힘든 시기였지만, 그는 결국 위기에서 벗어났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그를 한 단계 더 올려놓은 작품이었다. 실제로 50세 되던 해부터 딸 역할을 바꿔 가며 장기 공연한 작품인데, 눈물을 간신히 참던 관객의 눈을 매섭게 마주치며 연기를 했더니 다들 폭풍 오열했다. 크리넥스를 꺼내 생판 모르는 옆 사람에게 건네 주는 게 다 보였다. 모녀 둘이 와서는 손을 꼭 잡고 나가는 일이 늘 벌어졌다.

◇죽든가, 아니면 여든 살이 되든가

‘박정자씨, 정직한 세월은 어김없이 또 해를 바꾸었네요…’ 무대예술가 이병복이 2008년 고운 글씨로 보낸 편지 역시 기증품 중 하나다. 이병복은 2015년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으며 ‘시간을 상으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해 사람들을 뭉클하게 했다.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할 일이 많다는 얘기였다.

무대예술가 이병복이 박정자에게 보낸 편지.

박정자는 2020년 자전적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를 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될 때라 마스크를 쓴 관객이 객석을 채웠다. 그걸 보고 눈물이 났고 ‘나이를 먹었다고 주저앉을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가끔 ‘마스터’나 ‘파묘’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박정자의 진짜 정체성은 여전히 무대에 있다고 했다. “배우란 한 사람에 국한된 인생이 아닙니다. 계속 다른 캐릭터로 여행을 해야 하죠.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럼 연극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다면 디지털이 먼저 소멸되겠죠. 그래도 아날로그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연극이에요. 그 대신 연극은 가난하죠. 가난해서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박정자는 올해 ‘고도를 기다리며’에 이어 연극 ‘햄릿’의 광대 역,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 모친 조마리아 역을 준비하고 있다. 연극 ‘19 그리고 80′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79세가 되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죽든가, 여든 살이 되든가.” 세 해가 더 지난 지금 그는 82세 현역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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