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마동석과 분배적 정의
범죄도시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마동석이 염원하는 범죄 없는 도시가 도래하면 마동석은 진짜로 행복할까, 하고요. 아마도 나쁜 놈들을 더 이상 못 패줘서 금단증상에 돌아버리진 않을까 걱정돼요. 마동석의 주먹에 악당이 휙 날아가(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날아간다) 철제 캐비닛에 쏙 박히는 장면에 우린 속 시원하다며 열광하지만, 어쩌면 마동석은 폭력중독, 단죄중독 환자는 아닐까 말이에요.
그래요.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 착한 놈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는 없어요. TV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도 이런 쫄깃한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게 악에 받친 착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은 나쁜 짓이 뭔지 몰라서 악에 받치면 닥치는 대로 저지른다. ‘적당히’란 게 하나도 없다”고요.
이번 ‘범죄도시4’는 더욱 그래요. 마동석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전치 2개월이에요. 마동석이 뜨는 이상한 눈만 봐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지경이라니까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마동석은 더 강력해지고 빌런은 더 약해져서, 막판에 비행기 1등석에 탄 사이코패스 칼잡이 김무열이 빵 자르는 칼의 끝을 부러뜨려 날카롭게 만든 뒤 마동석의 여기저기를 찌르는 장면을 보노라면, 이쑤시개로 4만 원짜리 수박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앙증맞은 느낌마저 나더라고요.
사실, 김무열에겐 이상하리만치 연민의 정이 느껴졌어요. 온라인 불법 도박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천문학적 돈을 번 IT 천재 이동휘의 해결사로 진흙탕 삶을 살았지만 대가를 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해온 그는 이런 살인마답지 않은 대사를 똘마니들에게 날려요. “가진 놈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더 많이 갖는 거야. 난 적당히 나눠 먹을 거야.” 아아. 범죄도시의 기존 빌런들처럼 탐욕에 영혼을 잠식당하긴커녕, 이놈이야말로 공정과 상식을 알고 분배적 정의를 실천하는 절제의 화신이 아닐까 말이에요.
이처럼 빌런이 취약해지는 현상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 스토리텔링의 무시 못 할 트렌드로 자리 잡았어요. 그 옛날 스릴러의 아버지 앨프리드 히치콕은 “악당이 세야 영화가 산다”고 갈파하셨지만, 요즘엔 너무 강력한 악당의 존재가 관객에게 지나친 스트레스를 준다는 이유로 자제되는 추세죠.
지난달 개봉한 애니메이션 ‘쿵푸팬더4’도 그래요. 쿵푸 마스터들의 능력을 그대로 복제하는 카멜레온이 빌런이랍시고 나오는데, 이토록 무기력한 악당은 처음이 아닐까 싶어요. 1편에서 20년간 갇혔던 어둠의 감옥에서 탈출한 흑표범 ‘타이렁’이나 3편에서 고통의 지배자이자 복수의 야수로 등장하는 물소 장군 ‘카이’에 비하면, 이번 악당 카멜레온은 꼭 안아주면서 그 눈물을 혓바닥으로 남김없이 핥아주고 싶을 만큼 동정심이 간다니까요? 오히려 느리고 취약한 한계적 존재인 카멜레온이 타고난 강자들을 벤치마킹하여 새로운 개념의 리더로 우뚝 서려는 야심에선, 저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미력한 보통 사람들의 숨은 열망마저 읽혔어요.
바로 이 대목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 등장하는, 이름도 패셔너블한 악당 ‘신드롬’이 떠올랐어요. 당초 신드롬은 주인공 인크레더블처럼 타고난 초능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어요. 과학 지식을 동원해 스스로 개발한 로켓부츠를 신고 정의를 수호하는 ‘인크레더블 보이’가 되려 했지만, 인크레더블에게 퇴짜를 맞으면서 악당으로 돌변하죠. 신드롬은 무식하고 힘만 센 인크레더블로선 상상도 못 할 이런 심도 있는 대사를 던져요. “너처럼 타고난 초능력이 없이도 난 해냈어. 진짜 영웅이 뭔지 사람들에게 내가 보여줄 거야. 누구나 슈퍼 영웅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면, 결국 영웅은 사라지게 되는 거야.”
와우, 나쁜 놈 대사치곤 과하게 인텔리전트하고 마르크스적이죠? 맞아요. 요즘처럼 선동이 난무하는 눈알 돌아가는 세상에선 피아를 구분하기가 점점 힘들다니까요? 잊지 마세요. 적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요. TV 드라마 ‘미녀와 순정남’을 보세요. 소녀 가장으로 소처럼 일해 온 여배우 임수향의 적은, 그녀의 사랑을 돈으로 사려는 재벌이 아니라, 그 재벌에게 딸을 팔아치우려는 얼굴 탱탱한 친엄마랍니다.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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