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또 다른 5월과 팔레스타인
“옛날에 사격장은 유일하게 구타가 허용되는 곳이었다.” 갓 입소한 훈련병이라면 지금도 접하게 되는 풍문이다. 첫 사격훈련을 위해 총을 쥐고 제 차례를 기다리는 훈련병들에게 그 풍문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혹시 무언가 일이 잘못돼 누군가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훈련병들을 휘감아 잔뜩 긴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사격의 경험은 허탈할 만큼 별것 없었다. 한번 쏴보면 마치 신기루처럼 긴장이 사라지고, 이내 사격은 일상적인 군 생활의 일부가 된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훈련소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향해 쏘는 것도 처음이 힘들 뿐 익숙해지지 않을까. 남자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인간이 폭력에 길들여지는 걸 보았다. 등교 첫날부터 휘둘러진 ‘빠따’ 소리. 공기를 가르며 몸에 착 달라붙는 소리에 다들 질겁했지만, 한 달이 지나자 엉덩이의 피멍은 보통의 일상이 됐고, 인간이 폭력과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하지만 폭력에 익숙해진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군인들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사한 활동을 보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군인 중에 오랫동안 괴로움을 안고 살았던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분명 학살을 실행한 가해자였으며 동시에 거부하기 어려운 명령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사실 한국군에게 광주시민은 ‘처음’이 아니었다. 광주 학살을 다룬 미국 국방정보국의 기밀문서는 ‘광주 시민은 베트콩이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에서 학살 경험이 광주시민을 향한 학살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보상을 얻고자 베트남 파병을 적극 추진했다. 피와 총탄에 얼룩진 ‘베트남 특수’는 산업화의 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한국사회를 폭력에 길들였다.
베트남의 전쟁과 학살에 연루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당시 한국사회는 가해자의 편에 섰지만, 1968년 여름 미국에선 반전운동이 거세게 타올랐다. 미국의 청년들은 가해자가 되기를 거절했다. 베트남 땅에 폭격을 가하던 미군 폭격기가 동아시아의 작은 섬 오키나와에 배치되자,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이라 불렀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며 격렬한 반전·반기지 운동을 전개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직장인 기지의 철거를 주장하며 파업을 벌였다.
지금, 베트남 반전운동의 기억이 소환되고 있다. 지난달 미 컬럼비아대학 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에 돌입한 뒤로 미국 전역과 유럽의 대학들로 반전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 요구는 대학 당국이 이스라엘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라는 것이다. 이는 2005년부터 시작된 비폭력 운동인 BDS(보이콧, 투자철회, 제재)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베트남이 흘린 피로 ‘특수’를 이룬 과거처럼, 가자지구의 집단학살도 한국에 돈을 벌어다 주고 있다. 작년 10월 이후 한국은 이스라엘에 128만달러(약 17억6000만원) 이상의 무기를 수출했다. 경제신문들은 ‘방산주’에 주목하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베트남 전쟁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은 용병을 보내는 대신 무기를 팔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또 다른 5월은 가능하다. 시민단체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열군)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열군의 창립일은 4월26일. 1991년 5월 항쟁이 촉발하는 계기가 된, 대학생 강경대가 전투경찰의 폭력에 사망한 날이다. 당시 소위 ‘백골단’이었던 열군의 활동가 박석진은 시민을 향한 폭력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며 ‘전경 양심선언’을 했다. 2024년 5월 현재, 열군은 팔레스타인에 가해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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