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좌절을 멀리하고 [똑똑! 한국사회]
송아름 | 초등교사·동화작가
교사로서 늘 마음에 품고 있는 화두는 ‘어른’이다. 아이들 곁에 있으면서 그들의 성장과 안녕을 책임지는 교사는 당연히 어른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사가 어떤 어른이어야 하는지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알 수 없었다.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의 좋은 점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이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키며 그럭저럭 상처 안 받고 항의도 안 받는 요령을 터득하며 살아왔다. ‘교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이원재, 홍세화 지음) 책이 반가웠던 건 그래서였다. 오랫동안 풀다가 내려놓은 문제의 모범답안을 만난 기분이랄까. 질문을 품었던 사람은 정선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이원재 선생님, 답한 사람이 홍세화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미더웠다. 이런 책을 누가 내나 보았더니 김민섭 작가였다.
지난달 중순 김민섭 작가가 페이스북에 홍세화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겸손’이라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하얀 종이에 ‘겸손’ 두 글자가 적힌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대 중반, 친구를 따라 송년회에 갔다가 홍세화 선생님을 만났던 것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숙제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었다.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고, 독재정권을 지나왔다고는 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던 열다섯살 소녀에게 분단국가의 희생자로 독재정권에 대항하다 인생이 바뀐 어른이 들려준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특히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다는 개똥 세개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내가 애독자인 걸 아셨던 걸까. 선생님은 그날 처음 본 나를 따뜻하게 챙겨주셨고, 교대생이라고 하자 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몇번이나 말씀하셨다. 그 기억을 거의 15년 만에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다. 나는 ‘교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를 펴들었다.
작년 여름, 교사들은 아프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겪었던 일은 교사들 사이에서 십여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던 일들이었다. 나 하나 참고 끝내면, 올해만 넘기면, 하고 혼자 속 끓이며 지나갔는데, 그 일이 결국 제일 어리고 약한 막내 선생님을 향했다는 사실에 미안해했고, 절망했고, 분노했다. 어쩌다 학교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홍세화 선생님은 우리 교육이 일제 식민주의를 거쳐 해방 후에도 어떤 시민을 길러낼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전체주의 교육을 해왔고, 갑자기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수요자 중심 교육을 표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신민에서 시민이 되는 대신, 고객이 된 것’이라는 거다. 시민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만큼 책무성도 갖는다. 그걸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지금 우리 학교는 고객 만족을 목표로 삼는 서비스 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민주시민 양성’이라는 우리나라 교육 목표를 떠올리면 뭐 그렇게 크고 낯간지러운 목표를 세우나, 오늘 하루 아이들과 별 탈 없이 행복하면 됐지, 하고 생각했다. 학교 일로 가슴앓이할 때마다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데 시스템을, 관리자를, 학부모를 문제 삼아 좋을 게 뭐가 있냐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물러섰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바로 내가 삼킨 세번째 개똥이었다.
뒤늦게 찾아 읽은 선생님의 마지막 칼럼은 나 하나 외친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외롭게 싸우는 대신 조용히 침묵을 선택했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스스로에게 ‘끝내 냉소와 좌절을 멀리하라고’,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라고 다짐한다는 말에서 슬픔과 의기가 함께 읽혔다. 선생님이라고 냉소와 좌절을 삼키는 날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또 다짐하고 걸어가셨을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관성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 성찰하며 뚜벅뚜벅 걷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성숙하라는 말씀을 꾹꾹 눌러 쓰며 홍세화 선생님을 추모한다.
* ‘교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이원재, 홍세화 지음, 정미소, 2023)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냐고 묻는 당신에게’(2024)로 개정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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