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드리고 있다”는 말 [뉴스룸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썼다 하면 사과문인 시절이 있었다. 편집국(뉴스룸국)을 떠나 대내외 소통·협력 업무를 맡았던 몇년 전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일하는 회사에 좋고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데, 안 좋은 일이 유독 몰렸다. 험난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운 것이 있다. 어설프게 사과하느니 입 닫는 게 낫다. 예컨대 ‘독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깊이 사과드린다’ 식의 조건문 사과다. 이 문장에 생략된 것은 ‘심려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지만’이거나 ‘심려를 끼쳤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속내다. 사과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과가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위기관리 전문가들이 늘 강조하는 사과의 원칙은 대체로 네댓 가지쯤 된다. 자신의 잘못을 명확히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어차피 인정할 거면 빠른 게 좋다. 억울하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어서는 안 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음이다. 조건부 사과는 피해야 한다. 그중에도 ‘심려를 끼쳐드렸다면’보다 더 나쁜 건 ‘기억나지 않지만’ ‘일부러 하지는 않았지만’ 따위의 변명성 조건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왜 사과하나. 마지막 원칙은 재발 방지 약속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보상 계획을 덧붙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과받는 이들의 입장을 헤아려 장황하지 않게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최근 연예계에서는 황당한 사과 사태도 이어졌다.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는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이유로 자필 ‘열애 사과문’을 발표했고, 그룹 뉴진스의 민지는 칼국수를 모른다고 했다고 오랫동안 비난받다가 ‘칼국수 사과문’을 내놨다. 연애가 잘못일 리 있을까. 칼국수를 잘 모르는 것도 죄인가. 이 사과문들은 소속사의 위기관리 기획이겠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하게 서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트집잡기식 억지 비난에 자세를 한껏 낮춘 태도 자체가 먹혀들어간 효과가 있었다. 2007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둘째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들에게 보복 폭행한 사건이나, 2014년 당시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처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사과 참사와 견줘보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사과는, 1년9개월 만에 하는 기자회견만큼이나 기이했다. 윤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와 관련해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친 부분”이라고 언급했다.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란 표현에는 불법 행위는 아니라는 의도가 담겼다 해도, 검찰 수사가 시작됐으니 이해할 여지는 있다. 국민들은 걱정하기는커녕 분개해왔다는 점에서 사과의 몇몇 원칙에 부합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국방송(KBS) 특별대담에서 윤 대통령이 “아쉽다”고 한 것보다는 진전된 표현이다.
그러나 “사과를 드리고 있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아무래도 더 곱씹어보게 된다. ‘사과’보다 ‘드리고 있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미묘한 어법이어서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미안해’가 아니라 ‘미안하다고 하고 있잖아’처럼 들렸다. 사과에 진정성을 못 느낀다는 여론은 다 이유가 있다. 찬성이 70%에 이르는 ‘김건희 주가조작 의혹 특검’과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방해 의혹 특검’ 모두를 윤 대통령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총선 패배에 떠밀린 형식적 사과라고 국민들은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 여사의 과거 사과도 되새겨진다. 윤 대통령이 후보자이던 2021년 말, 김 여사의 허위 이력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15년에 걸쳐 최소 5개 대학에 허위로 작성한 이력서를 제출해 강사와 겸임교수로 채용됐다는 의혹이다. 이때 김 여사는 “잘 보이려고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도 있었다”고 사과했지만 사문서 위조나 사기 등 범죄 혐의 제기에 대한 해명은 없고 두루뭉술한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을 뿐이다. 여태껏 이런저런 다양한 혐의와 의혹에 대해 명쾌한 해명이 불가능하기에 솔직한 사과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과는 자신감에서 비롯한다. 자신감은 진정성으로 단단해진다. 윤 대통령도 진정성이 충분했다면 “사과를 드리고 있다”고 늘려 말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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