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좋은 연극’ 위해 헌신한 연극계 큰 어른
임영웅 선생님을 떠올리면 함께 처음 작업했던 내 작품 ‘카페신파’(2004년)가 생각난다. 살아있는 작가가 왜 연습장에 오지 않느냐는 일침에 그땐 거의 매일 연습실에 나갔다. 간혹 빠지기라도 하면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셨고, 내겐 연습 내내 눈도 안 마주칠 정도로 연극 작업이 최우선이셨다. 지금 내가 어쭙잖게라도 연출 흉내를 내고 작업을 최우선에 두는 자세는, 그 시절에 매섭게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다.
2024년 5월4일 새벽 3시23분, 연극계 큰 어른이신 임영웅 선생이 타계하셨다. 향년 90.
연극은 사람을 홀린다. 연극을 만들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자신은 껍데기만 남았고 그 안에 연극만 들어차 있다. 임영웅 선생은 내가 만난 연극인 중 가장 지독하게 연극을 사랑했고 연극에 홀려 평생을 사신 분이다.
1948년 서울 휘문중 재학 시절 ‘마의태자’로 첫 무대에 출연한 뒤 선생의 인생은 늘 연극과 함께였다. 고교 시절엔 피난지의 부산에서도 연극을 만들었는데 ‘여로의 끝’이라는 작품을 기획하여 주연에 제작까지 맡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서라벌예대를 거쳐 신문 기자나 방송국 피디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연극 작업을 지속했다. 연출만이 아니다. 일찍이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하여 전문성을 강조했던 제작자였으며 산울림소극장을 운영했고, 최근에는 가족들이 그 뜻을 이어 계속 극장을 운영하고 있으니 연극에 대한 그 깊은 홀림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여러 업적 중 선생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부조리 연극의 정수인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작)를 연출한 일일 것이다. 새로 지은 한국일보 사옥에 소극장이 들어섰고, 1969년에 개관 공연으로 올렸다. 그해 최고의 문제작으로 관객 동원은 물론 큰 상을 휩쓸었고 그 상금으로 1970년 산울림극단을 창단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부조리 연극 정수 ‘고도를 기다리며’
50년간 1500번 공연에 22만명 관람
1966년 국내 최초 창작뮤지컬 연출
전문성 위한 PD시스템도 선도 도입
1985년 사재 털어 산울림소극장 개관
‘좋은 연극 열심히’ 하는 예술인들 품고
‘위기의 여자’ 등서 여성 주체로 내세워
그러나 연극은 태생적으로 마이너 예술이다. 라이브라 소수의 관객만 볼 수 있고 막이 내리면 사라져버린다. 선생은 그 한계와 싸우면서 50여년간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1500번 이상의 공연과 22만 관객 관람이라는 신화에 가까운 숫자, 부조리 연극을 정의했던 마틴 에슬린도 이 작품을 보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아비뇽, 폴란드, 일본 등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해외 공연보다 나는 한국에서의 공연이 더 감동스럽다. 한국처럼 빨리 변하고 모든 것이 쉽게 잊히는 사회에서 50여년 동안 한 작품을 계속 공연하고 지속적으로 사랑받았던 전례가 있었던가. 이제 우리 사회는 연극을 잘 보지 않는 일반 대중도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선생은 창작극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 ‘환절기’(오태석 작) ‘달집’(노경식 작) ‘쥬라기의 사람들’(이강백 작) 등 문제작들을 연출하였고, 페미니즘 연극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이전인 1980~90년대에 이미 여성을 주체로 내세운 작품들로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 작품들이 바로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담배 피우는 여자’ 등으로, 출연했던 박정자·손숙·윤석화 선배는 신드롬에 가까운 작품의 성공과 더불어 대중의 기억에 깊이 각인됐다. 선생은 또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도 그의 연출작이고 그 외에도 여러 편의 뮤지컬에 관여했다.
1985년에 선생은 사재를 털어 산울림소극장을 개관하였다. 이미 있던 건물을 사거나 빌린 것이 아니다. 극장용으로 건물을 새로 지었고, 자체 제작이 원칙이었다. 제작 극장이니 당연히 레퍼토리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에는 선생만이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이자 예술적 전우였던 불문학자 오증자 선생의 헌신도 같이 상찬해야 한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여성 중심의 연극을 비롯해 시대에 맞는 레퍼토리를 계속 무대에 올렸다. 민간 극장 자체가 부족했던 초기에는 사물놀이,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에도 공연할 기회를 부여했고 후배 연극인들에게도 여러 기회를 제공했다. 나 역시 그 기회 속에 선생을 알게 된 경우다.
연습실 밖에서 만나는 선생은 오르기 힘든 고봉준령이 아니라 품이 넉넉한 언덕 같으셨다. 산울림 극단의 ‘좋은 연극을 열심히’라는 모토처럼 연극에 매진하는 각종 사람을 반기고 그들이 더 좋은 연극을 만들도록 부족함까지 품어주었던, 유쾌하고 수용력이 큰 언덕. 그래서 그렇게 개성 강하고 예민한 예술가들이 선생과 산울림 주변에서 북적였으리라.
영결식장에는 비가 오는데도 연극계의 많은 선배들이 모였다. 우리에게 ‘좋은 연극’에 대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던 선생을 추모하면서 오열하던 전무송 선생의 추도사를 들으면서, 한 시대가 저렇게 저무는구나, 그 노스탤지어에 우리들을 품어주던 큰 언덕을 잃은 섭섭함이 보태어져 나도 한참을 울었다.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이 한평생 기다린 고도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때 선생은 “연극을 만들기 좋은 세상”이라고 답하셨다. 선생님, 저희가 그 고도를 계속 기다릴게요. 부디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김명화/극작가·연출가, 극단 난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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