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신도시의 약탈자들

이윤희 2024. 5. 1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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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금융부동산부 부동산팀장

이윤희 금융부동산부 부동산팀장

십수년 전 유학 비용을 벌기 위해 분양권 전매 브로커 조직, 이른바 '떳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들은 건설사나 시행사로부터 미분양·미계약 아파트 물량을 떠다가 매수자가 나타나면 프리미엄(피)을 받고 팔아치우거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사람들에게 실제 매수자를 연결해 공증 뒤 대납을 하게 하는 등 불법 전매를 하는 게 주업무다. 떳다방은 마치 철새처럼 분양 현장을 떠돌았다.

"어느 날은 행색도 추레해가지고 애를 업은 여자가 왔지 않겠어. 그때 정부도 신도시 홍보에 열을 올린데다 '내집 마련의 마지막 기회다' '노른자 땅이다' '무슨 전철이 들어온다' 하면서 언론에선 얼마나 떠들어댔냐고. 초조해져서는 무리해서 목돈을 만들어 나온 것 같았어, '아줌마 빨리 집에 가세요 빨리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

그래도 큰 사기만 안 당했으면 지금 쯤은 호황기를 지나면서 10억원도 넘는 수도권 집 한 채 갖고 있겠다고 결국 해피엔딩이라고, 같이 웃고 말았지만 그날 나눈 이야기의 뒷맛은 영 씁쓸했다.

2기 신도시는 서울로부터 30km 이상 떨어진 외곽 지역에 건설됐다. 입지가 서울에서 멀어진 대신, '베드타운' 성격이 짙었던 서울 동북권(강북·광진·노원·도봉구)과 노태우 정권의 1기 신도시와는 달리, 자족기능이 추가됐다. 판교와 동탄, 시흥 등에는 대규모 업무지구를 조성했다.

그것도 일부 신도시에 해당할 뿐, 대부분은 여전히 아파트를 중심으로 건설됐다. 공급 과잉이 우려됐던 신도시의 아파트들은 지난 몇년 간 이어지던 저금리 호황기에 모두 팔려나갔다. 큰 사기를 당한 것만 아니라면, 미분양 아파트를 노른자 아파트로 속아 산 정도라면, 사기 피해가 복구되고도 남을 만한 호황이 지나갔다.

하지만 '폭탄 돌리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도시 곳곳의 상가들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과거 수준으로 상업용지를 과도하게 배정한 것이 일차적 문제, 경쟁입찰에서 높은 땅값이 매겨지고 상가 분양가 또한 과도하게 책정된 것이 그 뒤 이어지는 문제였다.

신도시 상가의 수분양자 대부분은 '갓물주'가 아니라, 분양사무소에서 은퇴자금에 대출금을 보태면 연 5% 안팎의 안정적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겨우 공실을 채우더라도 장사하는 사람 역시 수익을 내지 못하니 임대료는 오르지 못하고 빚을 낸 임대인은 임대료를 내리지도 못한다.

'아빠만 고생하면 모두가 행복한' 신도시는 애초에 '중산층+4인 가구+외벌이 가부장'을 모델로 기획됐다. 그래서 신도시가 '출산율 0%대'의 나라에서 얼마나 더 지어지고 정상적으로 운용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젊은 1인 가구, 독거 노인, 딩크족, 미혼부모, 동성 커플, 다견가정 등 가정의 형태는 제각각이고 삶의 모습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비관적인 부동산 전문가들은 일본 도쿄의 실패한 신도시인 다마신도시를 입에 올린다. 우리의 도시계획은 일본과 닮아있고, 공교롭게도 다마신도시는 도쿄도 구부의 중심지로부터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딱 서울 도심에서 2기 신도시만큼의 거리다. 이들은 급속도로 노화하는 한국에선 수십년 안에 빈집이 속출할 것이라고 한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신도시의 자산가치는 최대 80%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도 한다.

반면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다마신도시와 우리 신도시는 다르다고 한다. 배후에 탄탄한 대기업 일자리가 있고 이에 따라 젊은 인구의 유입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주인구가 가장 젊다는 신도시들은 20년 뒤에도 젊을까. 지금 이대로 인구감소가 이어진다면 그때는 찾아보기도 희귀할 젊은 중산층의 4인가구가 "아빠만 고생하면…" 하면서 신도시로 갈까. 지금도 '쿠팡'과 '네이버 쇼핑'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상가를 찾아 장을 보고 쇼핑을 할까.

현재의 인구 붕괴 속도라면 신도시는 커녕 서울 시내 난개발된 곳들도 어려울 지경이다. 도시계획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시의 약탈자는 떳다방과 상가 임대사무실이 아니라 정부와 LH가 될 것이다. st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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