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로 빚어낸 흑백사진… 한 폭의 동양화 담아내다

김신성 2024. 5. 1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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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개인전 ‘길 끝에’
주상절리는 검게· 파도는 희게 ‘수묵의 맛’
‘수직’ 주상절리·‘수평’ 바다 절묘하게 포착
수직수평의 안정감 바다는 무욕의 안식처
숟가락 더미서 권력 다툼 인간군상 발견
아비규환 속 조화 ‘숟가락 지구’ 조형 탄생
길 끝에서 바다와 인간에 대한 성찰 담아

해무 낀 풍경이 마치 운무산수화 같다. 동양화에서 운무를 즐기는 이유는 기세를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여백 처리된 운무가 바로 그렇다. 수묵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흑진주’
작가 김영재는 그런 맛을 사진으로 구현해낸다. 수묵 맛이 나는 사진으로 바다의 역동적인 기세를 잡아채고 있는 것이다. 30초 정도의 노출로 파도를 구름처럼 보이게 만든다. 주상절리는 검게, 파도는 희게. ‘노출’과 ‘흑백’으로 조화를 부려 빚어낸 사유의 세계가 마냥 펼쳐진다.   

언뜻 보면 유장한 산맥을 보는 듯하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사진의 격을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흑백사진에선 수묵의 맛을, 컬러사진에선 수묵담채화의 맛을 진국처럼 끓여낸다. 동양화에서 먹으로 그린 그림에 옅은 채색을 더한 것을 수묵담채화라 한다. 색이 중심이 되는 채색화와 달리 수묵담채화는 먹의 농담 효과를 기본으로 삼고, 여러 색을 보조적으로 사용한다. 적절한 여백과 어우러져 깊은 맛을 내게 된다. 김영재 사진의 맛이다.

그의 사진은 선염기법의 바림효과까지 발현하고 있다. 선염기법은 분무기로 한지를 먼저 적시고 마르기 전에 수묵이나 채색을 가해 표현 효과를 높이는 방법이다. 붓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은은한 분위기가 나타난다. 안개 낀 산수의 흐릿한 정경이나 우중의 정취, 으스름한 달밤의 풍경을 담아내는 데 제격이다. 먹이 번지면서 흐릿하고 깊이 있는 색이 살아나는 바림효과를 얻을 수 있다. 김영재는 빛이 결핍된 환경에서, 예를 들면 흐린 날씨에 빛이 대상에 스며드는 순간을 포착해 다양한 스펙트럼의 바림효과를 살려내고 있다. 숙련된 인내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국수 주상절리’ (주상절리 1)
그는 요즘 제주 해안의 주상절리에 마음을 두고 있다. 해안에 육각형 단면의 돌기둥들이 규칙적으로 붙어서 수직을 이루는 풍경이다. 화산폭발이 만들어 놓은 절경이다. 여기서 바다라는 수평과 주상절리라는 수직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중문 계단바위’
앞서 그는 김 양식장 등 인간의 노동으로 일궈낸 구조물의 조형미가 어우러진 바다를 즐겨 찍었다. 끝없이 바다에 박힌 나무말뚝들은 대를 이어 일군 삶의 텃밭이자 바다 위에 그린 ‘숭고한 그림’이라 여겼다. 어쨌건 기존의 수평구도에 수직구도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수직수평의 구조는 단순, 심미, 절제의 미로 현대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현대 사진은 물론 현대미술에서도 중시한다. 현대추상미술의 대가 피에트 몬드리안도 수직은 생기를, 수평은 평온함을 나타낸다고 했다. 수직과 수평의 두 선이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만나면 안정감과 포근함을 선사한다. 김영재 사진에서 바다라는 수평과 주상절리라는 수직이 만나는 지점도 그렇다. 그의 사진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표현의 단계로 깊게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다가 무욕의 안식처로 다가선다.

‘의자’(설치).  자리(권력)에 오르기 위해 벌이는 아귀다툼의 경쟁을 설치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사진에 담았다. 
작가는 어느 날 서울 황학동 중고시장 주방용품점에서 의자 아래 수북이 쌓여 있는 숟가락을 발견한다. 의자에 먼저 기어올라 지위를 차지하려는 인간군상들이 떠올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권력)를 차지하고자 싸움질하는 모습을 보았다. 돈과 명예, 지위를 위해 전쟁 같은 무한경쟁을 벌이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스쳐 지나갔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소시민의 모습도 중첩됐다. 크게 보니 지구촌이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얼굴이었다. ‘숟가락 지구’ 조형물은 그렇게 탄생됐다. 아비규환이지만 결국 ‘지구촌 살이’라는 하나의 ‘조화’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의자’(사진)
그의 숟가락 조형은 진화를 거듭해 어느 때부턴가 지구를 이루고, 한데 어우러진 인간군상의 형태를 띤다. 이는 1980년대 이응로 화백의 군상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이 화백은 배경 없는 바탕에 몇 개의 선으로만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표정이나 입체감 없이 빠른 필치로 사람들의 몸짓만 읽히게 했다. 수묵화의 자유로운 필치와 생동하는 기운의 전형이다. 김영재가 숟가락을 구부리거니 꼬아서 만든 인간군상들과 흡사하다. 기운생동하는 정신성과 필획의 조형성을 빼닮았다. 여러 색깔이 조화를 이루는 바탕에 개미떼 같은 군상이 행진하는 모습의 작품도 보인다. 하모니를 이루는 풍경이다. 김영재는 이 화백이 생전에 남긴 “모두 손잡은 율동은 공생공존이고 그것이 화(和)’라는 말에 공감한다. 숟가락 지구, 숟가락 인간들의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 화백의 수묵 군상과 김영재의 숟가락 군상은 이 지점에서 만난다.

사진작가이자 조형예술가인 김영재의 개인전이 ‘길 끝에’라는 제목을 내걸고 21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1010갤러리에서 열린다. 

‘블루’(설치) & ‘블루’(사진).  숟가락을 이어붙여 만든 반구 형태는 ‘이상적인 지구’이고, 주변 음료 캔들은 인간 탐욕이 부른 환경재난이다. 
전시장 1층은 제주 주상절리를 촬영한 사진들(‘바다 시리즈’)이 포진했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 ‘숟가락 지구’ ‘블루’ 등 조형작품들(‘인간 군상 시리즈’, ‘길 끝에’)이 관객을 반긴다.   

작품 ‘블루’에서는 우주공간 속의 블루 지구를 형상하기 위해 ‘숟가락 지구’를 블루배경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주변에 놓인 색색의 음료 캔들은 인간의 탐욕이 부른 환경재난을 의미한다.

‘블루 - 마중’
최근엔 아예 블루바다에 ‘숟가락 지구’를 데려가 사진에 담기도 했다. 

그가 흑백사진을 선호하는 것은 잊혀가는 것들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어서다. 색이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흑백사진이 작업에 알맞단다. 설령 화면 안에 피사체가 많이 들어가 있어도 눈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에 싫증 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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