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 가는 제약사…'메이드 인 스페이스' 신약 만든다
제약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우주로 향하고 있다. 미세중력(Microgravity)의 우주가 의약품 개발속도와 품질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줄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돈이 되는 공간'이다. 우주 의약품 제조단가는 점점 떨어지는데 지구에서의 수요는 늘고 있다. 우주 의약품을 지구로 들고 와 비싼 값에 팔 수 있다는 제약사들의 구상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 의약품은 최근 단순 개념연구를 넘어 지구로 의약품을 다시 들고 오는, 세계 첫 우주 제약공장 실험까지 성공했다. '메이드 인 스페이스(Made In Space)', 본격적인 우주 제약(製藥)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우주제약 스타트업 '바르다스페이스 인더스트리'는 최근 화학 분야 논문 사전출판사이트인 '켐아카이브(ChemRxiv)'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치료 약물인 '리토나비르'를 우주에서 만들어 지구로 들고 오는 데 성공했다"며 "우주 의약품 상용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전에 우주에서 의약품을 합성하는 실험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만든 의약품을 지구로 들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구로 들어올 때 받게 되는 방사선이나 진동, 고온 등이 의약품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처음 입증됐다. 우주 제약공장에서 생산된 의약품을 지구로 가져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바르다스페이스는 우주 제약공장 제작 스타트업이다. 스페이스X 엔지니어 출신 윌 브루이와 벤처캐피털 파운더스 출신 아스파로호프가 2020년 설립해 위성 발사를 준비해왔다. 지난해 6월 스페이스X의 팰컨9 로켓에 실어 위성 '위네바고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위네바고 1호는 의약품 제조 캡슐과 지구 재진입용 캡슐 등으로 구성된다. 우주에서 의약품을 제조해 지구로 귀환하는 이동식 제약공장이다. 발사 후 지구 저궤도에 안착한 위네바고 1호는 우주에서 리토나비르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합성한 리토나비르는 지난 2월 21일 미국 유타주 사막에 착륙하며 지구로 돌아왔다. 합성된 리토나비르의 양은 수 ㎏으로 알려졌다. 리토나비르는 ㎏당 1000달러 수준에 판매된다.
바르다스페이스는 "리토나비르는 지구에서 결정화하는 데 4일이 소요되지만 우주에서는 23시간 만에 결정화가 가능했다"며 "우주에서 합성된 리토나비르를 분석한 결과, 고품질에 높은 순도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어 "기존 우주 의약품에 비해 제조단가를 10분의 1로 낮췄다"고 강조했다.
우주는 무중력이 아닌, 미세중력의 공간이다. 우주 어디를 가든 중력을 가진 행성이나 소행, 우주 먼지구름 등이 존재한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간이 거의 없다.
미세중력은 의약품 제조에 있어 천혜의 환경이다. 의약품 제조에는 단백질 결정화가 필수적이다. 결정화는 단백질 분자구조를 구조화하고 정렬된 격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얼마나 구조가 고르게 정렬됐는지가 의약품의 효과를 가른다.
지구에서는 중력이 이 과정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중력은 더 차갑고 밀도가 높은 유체 위로 따뜻하고 밀도가 낮은 유체가 상승하는 '대류 현상'을 유발한다. 대류 현상은 불균형한 결정이 생기도록 한다. 중력 때문에 부력이나 침전 등의 현상도 생기는데, 모두 단백질 결정화에 악영향을 주는 요인들이다. 미세중력하에서는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다.
또 결정 성장을 유도하는 '확산' 현상은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원하는 단백질 결정이 지구에서보다 빠르게 형성된다는 의미다. 단백질 분석 전문가인 이영호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력이 의약품 제작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며 "미세중력 환경에서는 순도가 높고 고른 단백질 결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세중력에 대한 과학연구는 1970년대부터 이뤄졌다. 세계 최초의 우주정거장이었던 구소련의 '살류트 1호'와 세계 2번째이자 미국의 최초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에서 미세중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했다. 미세중력 환경에서 의약품 제조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엿본 것은 1990년대부터다.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하기 시작하며 연구 분야가 의약품의 화학 및 약력학 등을 분석하는 데까지 확대됐다.
이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2000년 16개국이 함께 구축한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도 이어졌다. ISS 간행물인 '인류를 위한 ISS'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단백질 결정화와 관련한 누적 실험건수가 500건을 넘었다.
ISS 내 실험시설 108개에서 다국적 제약사 머크는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를,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는 신규 약물전달기법을,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는 당뇨병 치료제를 우주에서 개발하는 등 이미 세계 선도 제약사들의 연구가 진행됐다.
미래 블록버스터 우주 의약품들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와 쓰쿠바대는 듀센 근이영양증 치료 단백질 'TAS-205'를 ISS에서 합성했다. 이 병에 걸리면 근육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이 합성되지 않는다. 환자들은 20대에 심장 근육 기능이 멈춰 사망한다. TAS-205는 일본 타이호제약사가 2020년부터 임상 3상 시험을 진행 중으로 곧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스타트업 '람다비전'은 실명 환자를 위한 우주 의약품을 개발 중이다. 실명을 유발하는 희귀유전질환인 '색소성 망막염' 환자를 위한 인공망막을 만들고 있다. 망막을 제조하려면 종이처럼 얇은 단백질 층을 쌓아야 한다. 인공망막의 제기능 여부는 이 층이 얼마나 균일하게 쌓이냐에 달려 있다. 니콜 와그너 람다비전 최고경영자(CEO)는 "벌써 8번의 우주실험에서 인공망막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며 "우리의 목표는 최초의 인공망막 우주 의약품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람다비전은 지난해 11월 국내 제약사 보령이 육성하는 우주 헬스케어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바 있다.
이 밖에 글로벌 빅파마 '일라이릴리'는 우주 실험실제조기업 '레드와이어'와 손잡고 당뇨병과 심혈관 질환 치료제를, 미국 바이오스타트업 '마이크로퀸'은 난소암과 유방암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국내에서는 보령이 우주의학 연구에 최근 뛰어들었다. 민간 우주정거장을 짓고 있는 미국 우주기업인 액시엄스페이스와 올 초 조인트벤처를 설립하고 우주의학 연구를 포함한 우주 사업에 뛰어든다는 계획이다. 엔지켐생명과학은 우주 방사선 치료제를, 스페이스린텍은 우주 의학 연구를 통한 뇌 질환 진단과 치료 기술을 개발 중이다. 한림대춘천성심병원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027년 암세포 배양과 항암제 반응을 관찰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우주로 보낸다.
우주 제약은 장차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일란 로젠코프 파트너는 CNBC에 "우주 제약시장은 2030년 중 100억달러(약 13조6400억원)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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