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선생님이 늙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문 열어줘”

김선영 기자 2024. 5. 1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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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둔촌동 노후 주택가 인근 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강동야간학교(강동야학)의 입학·개학식이 열린 지난 9일.

1989년부터 36년간 만학도 1000명의 꿈을 이뤄준 강동야학은 1989년 개교 뒤 기업, 지방자치단체 등 후원과 직장인, 대학생 등 교사들의 무료봉사로 운영되는 야간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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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년 불밝힌 ‘강동야학’ 르포
배움의 기회놓친 70대 학생들
“공부할 수 있다는 건 기적같아
집에서 설거지하며 구구단외워”
본업 병행하며 수업하는 교사들
“우리 꿈은 ‘잊힌 스승’ 되는 것”
배움의 기쁨 강동야간학교 입학·개학식이 열린 지난 9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야학 인근 골목에서 이주성(가운데) 야학 교사와 학생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문호남 기자

서울 강동구 둔촌동 노후 주택가 인근 한 건물 지하에 위치한 강동야간학교(강동야학)의 입학·개학식이 열린 지난 9일. 19.8㎡(6평) 남짓한 교실은 책가방을 멘 백발의 학생들과 갓 대학을 졸업한 교사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1989년부터 36년간 만학도 1000명의 꿈을 이뤄준 강동야학은 1989년 개교 뒤 기업, 지방자치단체 등 후원과 직장인, 대학생 등 교사들의 무료봉사로 운영되는 야간학교다.

교권이 추락하고 공교육의 가치가 부정되는 시대, 야학 학생들은 ‘공부할 수 있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어릴 적 ‘부모가 육성회비를 못 내줘서’ ‘아픈 엄마를 두고 학교에 갈 수 없어서’ ‘할머니가 계집애 공부시키지 말라 해서’ 등 각자의 이유로 학교를 뒤로해야 했다. 못 배웠다는 상처는 평생 마음속 깊은 흉터로 남았다. 4년 전 강동야학의 문을 두들긴 권정옥(70) 학생은 초기 치매 진단을 받은 뒤 공부를 시작해 초·중·고 검정고시에 붙었다. 오늘 배운 것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렸던 권 씨의 뒤에는 수학을 가르치는 한상혁(34) 교사가 있었다. 그는 “우리 아들보다 어린 선생님이 할머니뻘 제자 인생 하나 밝히려고 끼니도 굶어 가며 용을 쓰는 모습을 보니 삶도 공부도 포기할 수 없었다”며 “깜빡하지 않으려고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반찬 만들면서도 구구단과 수학 공식을 외웠다”고 말했다. 그는 “나한테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게 ‘최고의 치매 치료제’로, 우리 스승님이 최고의 의사 선생님”이라고 했다.

지난 9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 강동야간학교 교실 벽에 ‘중학생이 되고 싶었다’는 제목의 학생 작품이 걸려 있다. 문호남 기자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4시간 거리를 통학하는 학생들도 많다. 경기 구리시에 사는 윤명주(72) 학생은 지난 3년간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야학에 온다. 윤 씨는 “남동생들 공부시켜야 해서 중학교를 중퇴했는데, 자녀들 학교 가정환경 조사서에 부모 학력을 쓰라는 걸 보고 가슴이 찢어졌다”며 “수십 년을 돌아 야학에 들어왔는데, 검정고시장에 들어가는 길에 ‘나도 배운 사람’이란 자부심이 들어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엄마, 등록금 대줄 테니 대학 가’라고 격려해줘 대학에 가볼까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율근(73) 학생은 남편과 함께 야학을 다니고 있다. 그는 “배움이 짧은 걸 서러워했던 남편이 ‘강동소식지’를 보고 같이 야학에 입학하자고 했다”며 “중학교 검정고시에도 떨어졌는데, 대학을 갓 졸업한 선생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아 고등반까지 가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곳 재학생은 30∼40명인데 대부분 70대 이상 고령층이다. 대다수 교사는 대학생, 직장인, 현직 교사 등이다. 이들은 본업을 병행하며 일과 후 수업을 가르친다. 12년간 야학 봉사활동을 해온 이정우(35) 강동야학 교장은 “4∼5년간 야학을 열심히 다니다가 등교 중 치매 증상이 나타나 길을 잃고 학교를 그만둔 학생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학생들의 배움의 한을 풀어주고 성장을 돕는 게 야학의 존재 이유”라고 밝혔다.

야학 교사들의 꿈은 ‘잊힌 스승’이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야학이 한국 사회에서 사라지는 게 이들 목표여서다. 이 교장은 “학생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보다 학교 공동체에서 삶의 길을 다시 찾는 게 더 중요하다”며 “수십 년 동안 묵혀뒀던 학생들 마음의 씨앗이 우리 학교에서 꽃으로 활짝 핀다면, 그게 교육의 가치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교실 한 벽면에는 지난 30여 년간 학생들이 써온 과제집이 빼곡했다. 그중 권 씨가 보여준 ‘배움’이라는 자작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넘들은 오십 년 전에 한 과제를 나는 지금 한다. 많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김선영 기자 sun2@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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