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한동훈, 낮은 곳 가야 가망 있다[이제교의 시론]

2024. 5. 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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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 편집국 부국장
尹 정체성 무언지 고민할 시점
거짓의 세상서 정의 수호 역할
김 여사 수사 특혜 예우 없어야
거야 탄핵은 피할 수 없는 수순
韓은 총선 패배 숙고 시간 필요
밑바닥 국민 만나며 재기 모색

“거기 누구냐(Who’s there)?” 햄릿의 첫 대사는 이 짤막한 실존적 물음이다. 진실이 묻혀버린 덴마크 엘시노어 성에서 속내를 감추고 배회하는 모든 존재에게 던지는 화두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독한 대면이다. 권력과 부의 주변에서 흔들리는 ‘정과 의’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분노, 외면·묵인도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열쇠가 숨겨져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 시스템의 파수꾼이자 형벌 집행자였다. 그곳에서 그는 화려하게 빛났다. 검찰총장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 비리 등 성역없는 수사를 벌였다. 문재인 정부의 탄압은 정치로 가는 시발점이 됐고 대중적 관심을 인화시켰다. 집값은 치솟고 안보는 불안하고, 사회 전체가 마음 줄 곳 없이 팍팍할 때 “사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한다”는 한마디는 국민 모두의 가슴을 때렸다. 위선 가득한 세계에 한 가닥 빛을 안겨 줬다. 그게 윤석열이 가진 정체성이다.

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인 김건희 여사의 300만 원 디올백 수수에 대해 지난 9일 사과하고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서는 ‘선 수사 후 특검’ 의사를 나타냈다.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써낸 답은 정해져 있다. 거야의 최종 표적은 탄핵이다. 각종 혐의로 재판 중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살길이 열린다. 조국 대표도 마찬가지다. 뒤집으면 윤 대통령 입장에선 정면돌파 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말이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수사는 동등하게 이뤄져야 한다. 김 여사는 제1·2야당 대표 부인 김혜경과 정경심 여사처럼 포토라인에 서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법리적으로 보면 청탁 대가성이 없어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한다.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의 본질 역시 사건 은폐·무마가 아니다. 과실치사 적용 혐의 대상을 입수명령을 내린 해병대 1사단장으로 국한할지, 명령을 따른 현장 지휘관까지 확대할지에 대한 판단의 문제다. 그 과정에서 용산의 의견 표명이 있었더라도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냉정하게 보면 두 사건은 이미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야당 192석, 여당 108석의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국민을 대표하는 영부인 자리에 김 여사가 다시 서려면 일정 기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채 상병 유족들의 아픔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대연정으로 권력의 반을 내주지 않을 거라면 꽁지 빠진 수탉이 아니라 사바나 초원의 수사자 같은 결기를 보여야 한다. 임기 단축 4년 중임 개헌은 또 다른 논쟁적 돌파구다. 책임질 부분은 책임을 지고 뚜벅뚜벅 가시밭을 걸으며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윤석열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제22대 총선의 패장이다. 패배 원인으로는 윤·한(윤석열·한동훈) 갈등으로 시작해 이철규 의원의 ‘선거 디테일’에 의존한 공천 작업 및 인재 등용의 무감동 패착,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에 머문 선거 프레임의 비전 부재 등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민주당 인사인 66세 이상민과 69세 김영주 의원의 영입은 치명적 실수다. 이 대표가 버린 낡은 카드를 주워들고 웃었지만, 혁신과 변화의 에너지를 스스로 갉아먹고 말았다.

한 전 위원장은 낮은 곳에 임해야 한다. 그는 압구정동 현대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에 사법시험에 붙는 엘리트 인생을 걸었다. 부인과 장인 등이 변호사인 법조 명문 집안이다. 바닥부터 돌아다녀라. 쇼처럼 보일지라도 주소를 험지 지역구로 옮기고 시장통에 무료 법률사무소를 내는 것도 좋다. 거기서 1000원 때문에 싸우고 거짓말도 하지만, 작은 것을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는 보통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 생태계 맨 아래의 실존체다. 이 대표는 그런 과정을 거쳤다. 7·8월쯤 열린다는 전당대회에 당 대표로 나설지 곁눈질할 때가 아니다. 국민은 섬겨야 하는 왕과 황태자가 아니라 함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할 친구, 동료 같은 지도자를 원한다.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교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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