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45>] 미국 최초의 금융 위기… 18세기 뉴욕은행 도산 위기가 만든 패닉

2024. 5. 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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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국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대 재무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은 최초의 국법은행(national bank), 즉 연방법에 의해 설립된 상업은행인 미국은행(Bank of the United States) 설립을 요구했고 1791년 연방의회와 연방 대통령은 미국은행 설립을 허가했다. 신주 인수 대금은 1주당 400달러(약 55만원)였다. 투자자들은 25달러를 청약증거금으로 지불하고 청약증서를 받았으며 잔금 375달러는 2년간 세 번에 걸쳐 나눠 지불했다. 주식청약증서는 아파트 딱지처럼 전매가 가능했다. 1790년대 미국의 주식청약 절차는 2020년대 우리나라의 주택청약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주식 거품과 채권 투기

투자자는 주식 대금의 25%는 정화(금·은)로 지불하고 나머지 75%는 미국 국채로 지불해야 했다. 주식 대금 납부 절차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미국에는 귀금속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식 대금 전부를 정화로 지불할 경우 청약자의 유동성 위험과 채무불이행 위험이 커진다. 청약 미달이나 주식 대금 미납 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국은행 설립이 무산될 수도 있다.

사진 셔터스톡

둘째, 주식 대금 75%를 국채로 납부하도록 한 것은 국가 부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전쟁 과정에서 13개 식민지는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발행했고, 연방 창설 이후 연방정부가 이것을 모두 인수했다. 국채 만기가 도래함에 따라 국가 부도 위험이 커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행은 시장에 떠도는 국채를 자본금 형태로 은행 장부에 옮김으로써, 국가 부채 만기를 연장하고 연방 재정의 숨통을 틔우기 위한 것이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실시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유사한 채무 만기 연장 행위에 불과하다. 이번에는 만기 연장 대상이 민간 부채이지만 말이다.1791년 초 미국은행 주식의 인기가 폭발해 25달러짜리 청약증서 가격이 수개월 만에 300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시장의 변화는 예측할 수도 없고 지속 가능할 수도 없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국채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재무 장관 해밀턴은 당시 미국 최대 은행이었던 뉴욕은행(Bank of New York)에 연방 자금을 투입하면서 시장에 개입해 15만달러 상당의 국채를 매입할 것을 요청했다. 국채 가격은 회복됐고 해밀턴의 개입은 시장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1791년 말 국채 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더니 1792년 초 갑자기 폭락했다. 많은 투자자가 당황했고 은행에서 돈(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이 발생한 것은 윌리엄 듀어와 알렉산더 매콤이라는 투기꾼 때문이었다. 은행가였던 듀어 일당은 대규모 대출을 받아 국채 가격을 통제하려 했다. 투자자들이 미국은행 주식 대금 4분의 3을 국채로 지불하기 위해서는 채권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저자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헤지펀드의 정당한 차익 추구 행위로 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듀어 일당은 상호 보증을 제공함으로써, 신용(대출)을 부풀렸다. 어수룩한 시대였기 때문에 특수관계인 간 상호 보증을 금지하는 공정거래법도 없었다. 듀어 일당이 이런 행위를 한 궁극적 목적은 미국 최대 은행인 뉴욕은행을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패닉

듀어 일당은 여러 상업은행에서 돈을 빌려 뉴욕은행에 예치한 다음 거액의 예금을 일시에 인출해 뉴욕은행에 유동성 압박을 가했다. 듀어 일당이 거액의 예금을 인출해 채권에 투자하면 채권 가격이 급등해 많은 돈을 벌게 되고 뉴욕은행은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결국 이들은 채권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도산한 뉴욕은행을 헐값으로 살 수 있게 된다. 뉴욕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처하자, 상업은행들 사이에 감염 효과(contagion ef-fect)가 발생했다. 뱅크런으로 상업은행들의 현금 보유액이 급감하자 단기 대출금 차환(만기 연장)이 불가능해졌다. 은행 채무자들은 차환되지 않은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증권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다른 투자자의 투자 자산가격까지 급격히 하락했고 결국 금융시장 전체에 공황, 패닉(panic)이 발생했다.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1792년 3월 금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존 애덤스 부통령, 토머스 제퍼슨 국무 장관, 에드먼드 랜돌프 법무 장관, 존 제이 대법원장, 해밀턴 재무 장관으로 구성된 감채기금위원회가 설립됐다. 이것은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수습을 위해 2008년 미 재무부가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을 만든 것과 유사했다. 뉴욕은행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해밀턴은 연방 자금을 뉴욕은행에 제공해 숨통을 틔워주고, 뉴욕은행이 나랏돈으로 국채를 대리 매입함으로써, 국채 가격을 안정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존 제이가 투표에 불참하고 정경 유착을 싫어하는 완고한 민주주의자 제퍼슨과 랜돌프가 완강하게 반대함으로써, 계획이 무산됐다. 가부동수에서는 어느 쪽도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수결 원칙이 무력화된다. 하지만 집요한 책략가였던 해밀턴은 결국 랜돌프를 회유하고 제퍼슨을 고립시킴으로써, 뉴욕은행에 10만달러(약 1억3800만원)의 연방 자금을 내보낼 수 있었다.

해밀턴은 뉴욕은행이 공황 상태에서도 계속 대출을 실행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뉴욕은행의 대출 자금이 바닥날 경우 재무부가 뉴욕은행으로부터 50만달러(약 6억9000만원) 상당의 국채를 매입할 것을 비밀리에 약속했다. 해밀턴의 계획에 의하면, 재무부가 뉴욕은행에 10만달러의 긴급 유동성을 제공하면 뉴욕은행은 상업은행들로부터 국채를 담보로 긴급 대출을 실행하게 된다. 국채가 은행 금고로 빨려 들어오기 때문에 국채 가격이 올라서 채권시장이 정상화된다. 채권 가격이 오르면 은행 담보 여력과 자산 가치가 커진다. 뱅크런으로 유동성이 고갈된 상업은행들은 국채를 담보로 뉴욕은행의 대출을 받기 때문에 유동성 문제가 해결된다. 뉴욕은행이 과잉 대출로 유동성 위기에 봉착할 경우 미국 정부가 나서서 뉴욕은행 보유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함으로써, 숨통을 틔워준다.

데자뷔

해밀턴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메릴랜드은행에도 유동성을 지원했다. 다만 이번에는 제퍼슨이 버티고 있는 감채 기금이 아니라 상인들이 납부하는 관세 수입으로 자금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몇 달 만에 해밀턴은 은행시장, 증권시장을 안정시키고 패닉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을 수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듀어 일당은 전 재산을 잃고 감옥에 갔다.

현대적 중앙은행은 자신들이 특별한 지식, 능력, 묘기를 부려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양 행세하지만, 사실 정부 지원을 받는 뉴욕은행의 위치에 중앙은행을 대입시키면 상황은 똑같다. 문제가 발생하면 시스템 안에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시스템 밖에 있는 더 큰 권력을 끌어들여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형제들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부모가 개입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 금융시장 붕괴를 불러왔고 시스템 밖에 있었던 연준(중앙은행)과 연방정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발생 당시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위기 발생 당시 신흥국 중앙은행은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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