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꿰뚫은 그날의 상처, “40년이 넘게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남순의 증언 [플랫]

플랫팀 기자 2024. 5. 1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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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44년 만에 말하는 이유
집안의 자랑이던 ‘영특한 맏이’ 그날, 계엄군에 맞고 연행되다가 엉덩이·성기 부분 대검에 찔려
“자궁 적출 후 병신됐다 생각” 결혼도 포기하고 평생을 홀로
가족에도 말하지 못했던 응어리 조사위 만나며 비로소 털어내
5·18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한 많은 피해자들은 2018년 서지현 검사의 ‘미투’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용기를 낸 이는 김선옥씨였다. 그해 김씨는 1980년 5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았고 석방 전 수사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공개 증했다. 서 검사의 ‘미투’에 이어, 김씨의 증언, 그리고 용기는 이어졌다. 정부 조사단과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에 피해 신고를 하고 조사에 응한 이들은 어느새 19명으로 늘었다.

김선옥씨의 공개 증언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옥주씨는 1988년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와 1989년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연행 이후 모진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전씨는 5·18 당시 광주에 우연히 방문했다 참상을 본 뒤 가두방송에 참여했고 시민들이 힘을 합칠 수 있게 구심점 역할을 한 여성이다.

사실 전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씨가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려던 그때, 또 다른 피해자도 증언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 학교에서 귀가 중이던 이 피해자는 군인 트럭에 납치돼 1시간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강간당했다. 사건 이후 피해자는 나주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1988년 무렵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가 됐다. 피해자의 오빠는 1989년 2월 국회 5·18 광주 청문회를 앞두고 5·18민주항쟁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 이지현을 찾아가 “청문회에서 동생의 사연을 공개해 동생과 어머니의 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회장은 피해자를 찾아가 듣고 청문회 증언 자료를 준비했지만 야당 국회의원들 등 관련자들은 오히려 만류하고 나섰다. ‘쟁점 사안이 아니니 진상규명을 위해 시급한 것부터 하자, 아무리 흉악한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했겠느냐, 너무 끔찍해서 믿어줄 것 같지 않다’는 등의 이유였다. 끝내 이 회장은 증언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2년 뒤 김선옥씨가 ‘미투’를 하면서 끊길 뻔한 피해자의 목소리는 다시 메아리가 돼 돌아왔다. 40여년 만의 ‘듣기’ 이후 조사위는 드디어 16명의 피해자에게 “당신의 피해가 사실”이라는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겠다고 한 이남순씨(67)와 정현순씨(69)를 지난 1일, 7일 인터뷰했다.

이남순씨(67)는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손바닥만 한 작은 빨간색 파우치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내뿜고, 물이 든 작은 병에 담뱃재를 톡톡 털고, 다시 한 개비 꺼내고를 반복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남순씨가 지난 1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내가 밥을 잘 안 먹어요. 3일에 한 번 먹을까? 배가 안 고파. 그 대신 담배를 달고 살아요. 그리고 커피를 맨날 수십 잔 마셔요. 이걸 마셔야 안 불안하거든. 병원에 가면 동생이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커피랑 담배만 먹는다고 이르더라고.”

이남순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당사자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씨의 사건을 포함한 16건의 피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개인들이 겪은 폭력의 주체가 국가 공권력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기자와 만난 이씨는 “이렇게 되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면서 “내가 갖고 있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게 규명된 거니까, 후련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다 살고 갈 때 되니까 인제는 국가가 인정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자신감 넘쳤던 스물셋, ‘여자로서 끝났다’ 생각하기까지
20대 시절 이남순씨의 모습. 이남순씨 제공

전남 곡성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영특한 아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서너살 때 ‘천자’니 ‘소학’을 뗐대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대가 정말 컸어요. 여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공장으로 가는 게 당연한 시대였는데, 저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죠.”

똑부러지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의 삶은 1980년 5월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스물세 살의 그는 남동생과 함께 광주에 살며 수예점에서 일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은 그가 매일 출퇴근하는 길이었다.

“5·18 이전엔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날 시민들, 학생들이 진압되는 걸 보고 저도 도청 앞으로 나간 거죠. 그 뒤로 도청이랑 YWCA 건물을 오가면서 밥을 지어 나르고, 상무관에서 시신을 닦으면서 도왔어요. 일부러 골목골목 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고등학생 세명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붕대 감아주고, 치료해주고, 옷 싹 빨아서 집에 돌려보내고 그랬죠.”

이남순씨가 지난 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계엄군에게 붙잡힌 건 5월 27일, YWCA 건물 1층 주방에서다. 전날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새벽에 요란한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같이 있던 대학생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걸 봤다. 혼비백산한 이씨는 “사람이 총에 맞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구타가 계속됐다. 그때 하복부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밖으로 끌려 나와 지프차를 타려고 한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엉덩이 뒤편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몸을 찔렀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자 다시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대로 까무러쳤다가 깨어났을 땐 국군광주통합병원 복도였다.

“병원에서 계속 하혈을 했고, 닦을 것 좀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대요. 옆에 쓰레기통을 보니까 다른 환자들이 감고 버린 붕대가 쌓여 있길래 그걸 아래에 대서 쓰고 버리고 했어요. 그때 어떤 군의관이 ‘대검으로 찍었구먼’ 하더라고요. 그제야 내가 뭐에 찔린 건 줄 알게 됐죠.”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뒤에도 이씨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사람이 많아서 끼어 자야 했고, 2인당 한 개씩 나눠주는 모포는 그가 흘린 피로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온 건 생리대가 아닌 신문지였다. “악취가 난다”라며 “하혈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 있으라”는 모욕도 함께였다.

그는 구금 한 달여 만에 훈방됐다. 한 달에 월경을 3주나 하고, 약을 먹어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집 앞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못했다. “병원 다닐 여유도 없고, 돈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다시 가서 또 거길 보여주는 것도 싫었고요.”

이남순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정말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몸’이 됐다고 생각한 건 어느 날 목욕탕에 갔을 때다. “때를 밀어달라고 하고 누워 있는데 세신사가 ‘이거 왜 이렇게 생겼냐, 이런 사람 처음 본다’고 한 거예요. 치료를 제때 안 하니까 상처가 자기 마음대로 나으면서 이상하게 된 거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알았으면 때를 안 밀었는데…. 그 뒤로 목욕탕엘 안 가요.”

일련의 경험은 이씨가 삶 전체를 바라보는 인식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등학생 땐 서울 명동 길거리에서 누가 연락처를 물어볼 정도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했다”며 “그런데 사건 이후로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도, 나한테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다. 내 피해를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궁 적출 수술까지 하게 됐고 ‘여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산부인과에 다시 가봤어요. 내가 누굴 만나 결혼하거나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안 된대요. 이미 석회화돼서 들어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하고 돌아왔죠. 그리고 상대방한테 말했어요. ‘너랑 사귀는 건 안 될 것 같아. 친구나 하자’고요.”

그는 지인의 아들을 입양했다. 결혼하지 않은 데다 일정한 직장이나 수입도 없어서 현재 ‘동거인’으로 살고 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현재 20대 중반의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 역할’을 한 건 이씨다. 그는 “아들은 내 삶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들을 키우냐고 하는데, 나는 여자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왜냐면 내 삶이 안 좋으니까. 딸을 키웠다가 나 같이 되면 어쩔 거야. 그래서 지금 아들이 너무 좋아요.”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씨가 겪은 피해에 대해 ‘성적 모욕 및 학대’와 ‘재생산 폭력’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생산 폭력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유산, 구타·자상 등으로 인한 유산·자궁 적출 등 재생산 권리가 침해된 폭력을 말한다. 위원회는 “2005년 5·18 관련자 보상 신청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작성한 소견서에 따르면 이씨가 자궁 적출 수술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고 했다. 수술을 권한 당시 병원에서는 혈이 뒤로 넘어가서 골반강 내에 염증을 일으키고, 출혈과 요통을 유발한다고 진단했다.

시선·낙인 두려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과거’
이남순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휴대폰에서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빈 기자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사람들의 시선과 낙인이 두려워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과거는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종일 커피와 담배만 달고 사는 것도 후유증의 일부다. 수술 뒤에 이씨는 “스스로 자궁 없는 병신 같다”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쓰지도 않을 생리대와 월경 팬티를 샀다. 주위에서 ‘자궁 없는 여자는 사람 구실 못한다’고 수군댈 것 같아서다.

그는 2018년부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로 진료받았고, 지금도 매일 8종류나 되는 약을 먹는다. 그래도 푹 자는 건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이씨는 “항상 뒤척이다가 똑같은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상무관에서의 꿈이다. 바닥에는 시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걸 보는 자신이 있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알코올 솜으로, 물 묻힌 천으로 계속 닦는 꿈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밀한 피해 경험에 관해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참 미웠나 봅니다. 여동생이 ‘처녀 농군’이었어요. 전두환이가 농촌지도자상을 주러 오는데, 군청에선 내가 언니인지 몰랐던 거예요. 비상이 걸렸죠. 동네 이장이 나한테 고향에 오지 말라더라고요.”

이남순씨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휴대폰에서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한수빈 기자

이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 눈을 피해 기도원 등을 돌아다니다가 쫓겨나듯 미국으로 갔다. 그는 기존 혈연, 지연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의 단절을 경험하는 2차 피해를 입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다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큰 돈이었던 700만원을 마련한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돈을 보냈고 이씨는 비자를 받아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 식품점에서 일하며 살았다.

“미국 가라고 할 때는 안 서운했어요, 좋았어요. 왜냐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으니까. 사건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가시내한테 글을 가르쳐서 집안이 망했다, 진작 돈 벌러 공장 보내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다른 식구들이 손가락질당한다는 죄책감이 컸죠. 항상 어떤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쭈뼛거리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이남순씨가 먹는 약들이 탁자에 놓여 있다. 이씨는 트라우마 후유증과 우울증 등으로 매일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고 말했다. 한수빈 기자

2004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재작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첫째 딸은 마지막까지 투명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씨는 “임종 직전까지 내가 돌봐드렸는데, 마지막 숨 직전에야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 봤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우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안 흘렸어. 그래도 좀 원망했어요. 그때 아버지를 꽉 잡고, 나한테 말 한 마디만 하고 가라고 화를 냈어요. ‘아버지, 내 이름 한 번이라도 불러볼 걸, 안 불러서 미안하다고 해. 잘못했다고 해. 그럼 내가 용서해줄게. 아무 말 없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나도 힘들었어, 진짜로 힘들었거든.’”

이씨의 이야기는 강간만이 성폭력 피해라고 보는 견해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회복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평생 그날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를 괴롭혔던 것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점, 누군가 얘기를 들어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그는 2005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을 했다. 장해등급 12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40여년 전의 치료 기록이 없어 연행 이후 38일간의 구금 일수만으로 피해를 따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돈은 10원도 안 줘도 된다. 그런데 내가 그때 고통받고 억울했던 일이 12급밖에 안된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 결정…“드디어 편해지더라고요”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에서 이남순씨가 두손을 가슴에 꼭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정효진 기자

피해 경험과 신체적·정신적·사회 관계적 후유증에 집중한 이번 조사위원회의 조사는 그에게 처음으로 큰 회복과 치유의 경험이 됐다. 위원회가 보상 심의 자료 전수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을 먼저 인지하고 이씨에게 조사 참여를 설득했다.

이씨는 “처음에 조사팀에서 전화했을 때 ‘내 정보를 어디서 알았느냐’며 벌컥 화를 냈다”고 말했다. “상담 선생님들이 곡성까지 나를 만나러 왔는데, 왜 출장비 쓰면서 여기까지 오느냐고 했어요. 그 돈 있으면 다른 데 쓰라고 했죠. 남의 치부를 드러내러 오니까 밉잖아요. 입 다물고 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손가락질당할 줄만 알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성폭력 피해자가 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원래 가족들도 내 이야기를 잘 몰랐어요. 위원회에서 이춘희 전 팀장님을 만나면서 선생님이 피해자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어요. 그리고 지난해 결국 진상규명 결정이 났을 땐 드디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후우’ 하고.”

지난달 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에서 이남순씨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조사위원회는 이씨의 사례에 대해 “사건 이후 생애사를 관통한 피해와 후유증은 성차별적인 통념을 내면화한 자신에게서 비롯한 점도 있지만, 20대에 가족과 고국을 떠나 내면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이제라도 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를 회복할 수 있는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고, 그 시작이 바로 이 피해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라고 했다.

이씨는 갑상샘암과 직장암을 앓았고 수술도 여러 번 했다. 동네에선 “결국 아무개가 죽었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절대 죽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모두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그가 눈물을 보인 건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처음 만난 간담회 자리에서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약해 보이기 싫어서 진짜 어디서 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선 울려고 마음도 안 먹었는데 눈물 콧물 다 나오면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아마 다른 피해자들 얘기를 들으니까 그랬겠죠. 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겠다, 나도 그렇게 살아봤잖아요. 그러면서 여태껏 누구한테도 얘기를 못 했던 내 상황이 슬펐던 것 같아요. ‘여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조금만 깨어났으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더 재미있게 살았을 텐데 말이예요.”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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