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로 출퇴근하는데 프리랜서라니요

신다은 기자 2024. 5. 13.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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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근로기준법 책임 피하려는 꼼수 사용자… 인공지능 뒤에 숨은 노동자들 인정해야
배달 노동자, 웹툰 작가, 대리운전 노동자 등 특수고용 및 플랫폼 노동자들이 2020년 12월21일 서울 세종로 일자리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플랫폼 종사자 특별법 추진을 규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이 기사는 '데이터 라벨링 노동실태'를 다룬 <한겨레21> 표지이야기입니다. 1부에서 이어집니다.♦

2024년 4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 최아무개씨가 처음 부당해고를 인정 받았다. 프리랜서 계약은 허울일 뿐, 데이터 라벨링 기업이 노동자 출퇴근시간과 근태, 작업 내용 등을 촘촘하게 통제한 사실이 드러난 탓이다. 이 기업은 라벨링 업계 1위 크라우드웍스다.

데이터 라벨링 업계에서 최씨 사례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개별 노동자의 근무방식을 따지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괄 계약하는 것이 관행처럼 자리잡았다.

특정 장소 출퇴근시키곤 프리랜서 계약

2022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데이터 라벨러로 일한 도아무개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데이터 라벨링 기업과 계약하고 3개월 동안 보험사 서류를 검수했다. 인공지능이 자동 인식한 글자(OCR)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원청 보험사의 일감을 받아다 하청 데이터 라벨링 기업이 잘게 쪼개어 작업자들에게 뿌렸다.

그 역시 데이터 라벨링 기업의 촘촘한 업무 통제를 받았다. 우선 출퇴근 시간과 장소를 데이터 라벨링 기업이 정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미리 지정된 사무실에서 일했다. 작업 방식도 업체가 준 자세한 가이드라인에 맞춰야 했다. 원·하청 기업은 수시로 작업 결과물을 검사했다. 원청 보험사엔 일주일에 한 번 직접 가서 작업물을 보여줘야 했고, 하청 데이터 라벨링 기업도 수시로 도씨의 작업물을 검사했다.

그런데도 데이터 라벨링 기업은 도씨에게 프리랜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자가 (고용계약이 아닌) 프리랜서 계약임을 알고 있다’는 조항도 덧붙였다. 근로기준법 적용은 노동자 본인의 인식과 무관하다. 노동자가 프리랜서로 잘못 알고 계약했어도, 작업의 본질이 노동이라면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아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도씨를 불안하게 한 건 계약서상 손해배상 조항이다. ‘작업자 실수로 기업에 피해가 가면 최대 5배를 배상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도씨가 이를 빼달라고 했지만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가 생활비를 벌려고 일한 건데 오히려 잘못해서 큰돈을 물어줄까봐 무서웠어요. 그 위험에 비해 단가는 턱없이 낮았고요. 불안하기도 하고 임금 대비 업무 강도도 높아서 결국 일을 그만뒀어요.” 도씨가 말했다.

판례에 따르면 노동자가 작업 중 실수하더라도 고의나 중과실이 아니면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 노동자를 지휘·감독하는 사용자 책임도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랜서 계약을 한 도씨는 그러한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다.

업계는 성장, 노동권은 ‘바닥’

한때 소일거리처럼 여겨지던 데이터 라벨링 노동은 이제 어엿한 산업으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 2021년 5천억원 수준이던 국내 인공지능 데이터 시장 규모는 2025년 1조9천억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한국수출입은행 2023년 10월 전망). 모두가 인공지능의 약진에 관심을 쏟지만 막상 인공지능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긱 워커'는 포장지에 불과하다. 기업이 그저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으려 프리랜서 계약으로 위장하는 일이 너무 많다. 이걸 노동자더러 각자 법적 분쟁해서 해결하라는 건 가혹한 얘기다. 프리랜서를 일정 규모 이상 사용하는 기업이 회계감사처럼 매년 정기 노동 감사를 받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건을 대리한 노무법인 로앤의 문영섭 노무사가 말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최씨의 법적 노동자성을 처음으로 인정했지만, 노동자가 개별적으로 입증하는 방식으론 한계가 뚜렷하다. 수많은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를 보편적으로 보호할 법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배달 노동 등이 활성화하면서 2021년 한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범위를 넓히자거나 별도 법을 마련하자는 등 플랫폼 노동자 보호에 관한 제도적 논의가 뜨거웠지만, 이후 구체적으로 진행된 건 없다. 그러는 와중에 데이터 라벨링 노동이 새로운 노동 형태로 급부상하고 있지만, 현재는 이런 논의 자체가 실종된 상태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한겨레21> 1513호 표지이야기 '데이터 라벨링' 노동실태 

[단독] 지노위,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 부당해고 첫 인정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4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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