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을 잃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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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18일.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 작가였던 홍세화 선생이 돌아가셨다.
서울의 입시학원 강사의 특강에 이어 당시 <한겨레> 시민편집인을 맡고 있던 홍세화 선생이 연사로 등장했다. 한겨레>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사회를 꿈꿨던 홍세화 선생님이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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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2024년 4월18일.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 작가였던 홍세화 선생이 돌아가셨다. 이 일은 상상 외로 나를 크게 흔들었다.
홍세화 선생을 처음 만난 건 고1이던 2006년, 대입·논술 전략 설명회가 열렸던 광주의 한 강연장에서였다. 서울의 입시학원 강사의 특강에 이어 당시 <한겨레> 시민편집인을 맡고 있던 홍세화 선생이 연사로 등장했다.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주최한 행사였기에 그에게 ‘논술과 삶’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다. 당시 내 관심사는 대학입시와 입신양명이었다. 그런데 “비판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얘기는 정치적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입시 너머의 삶으로 순식간에 시야를 넓혀줬다.
입시 너머의 삶을 보여준 사람
학교로 돌아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홀린 듯 읽었다. 신문에서 보던 칼럼보다 조금 긴 호흡의 사회비평 에세이를 처음 본 것이다. 종일 수능 공부를 하다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수구보수 세력의 만행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진보 정치’와 ‘연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이야기하는 글을 읽으니 내 존재가 생소해지는 기분이었다. 더불어민주당만이 진보인 줄 알았던 내게 더 왼쪽의 정치세력이 존재함도 일깨워줬다.
2011년 가을밤, 바츨라프 하벨의 시로 끝나는 진보신당 당대표 출마의 변을 읽은 날엔 얼마나 두근거렸던지. 전문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퍼다놓고 거듭 읽었다. 진보정당 활동이 숭고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몇 년 뒤 녹색당원으로 활동하게 된 내가 진보정치를 대하는 마음가짐의 연원이 홍세화 선생에게서 왔음을, 추모집에 실린 출사표를 다시 읽으며 깨달았다.(“‘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라고 검색하면 노동당 게시판의 원문을 볼 수 있다.)
기본소득 운동에 합류하면서부터는 관련한 자리에서 가끔 뵈었다. 2017년 ‘기본소득 개헌운동 출발 기자회견’을 마치고 카페에서 마주 앉았을 땐 ‘성덕’(성공한 덕후의 줄임말)이 된 것 같았다. 당신의 글이 청소년기의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얘기하고 싶었지만 당시 나의 자의식은 그런 걸 허용하지 않았다. 존경한다고 호들갑 떨어서가 아니라, 나의 활동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뵌 건 2023년 6월 녹색당 당대회에서다. 녹색당 신입당원으로서 종이에 써온 축사를 읽으셨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노동당과 이중 당적이 됐다며 웃으시던 게 가슴 찡하면서 좋았다. 나는 홍세화 선생의 목소리도 좋아했다.
나에게 어떤 단어들은 선생의 말을 새로 입은 것이다. 선생의 글을 읽으며 진보의 가치를 배웠는데, 생전에 더 깊이 대화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무엇에서 희망을 느끼는지, 어떨 때 행복했는지도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런 게 궁금해지는 어른이 계시다는 게 드문 일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대신 여러 책(<홍세화의 공부> <결: 거칢에 대하여> 등)에 남긴 선생의 당부대로, ‘선동’이 아닌 ‘설득’에 정성을 다하기 위해 겸손하고 치열하게 공부하고, 내 생각이 고집이 되지 않도록 ‘회의’하는 한 인간으로서 ‘결’을 돌봐야겠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과 텃밭에 다니며 친구들에게 밥 지어주는 시간 속에서도 진보정치를 위한 상상력을 키워야겠다. 그리고 신문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궁금한 어른이 있다는 드문 일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새로운 사상적 진지를 구축하는 사유를 끝까지 실천한 난민이자 이주노동자였던 지식인.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사회를 꿈꿨던 홍세화 선생님이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기도한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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