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세상]시인과 유행가 가사
‘하늘하늘 봄바람이 꽃이 피면/ 다시 못 잊을 지난 그 옛날/ 지낸 세월 구름이라 잊자건만/ 잊을 길 없는 설운 이 내 맘/ 꽃을 따며 놀던 것이 어제련만/ 그 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꽃을 잡고’ 전문)
1934년 발표한 평양권번 출신 가수 선우일선(사진)의 데뷔곡이다. 선우일선은 아름답고 청아한 음색으로 신민요를 불렀던 가수로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작고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노랫말은 김소월의 스승인 시인 김억이 작사했다. 당시에는 시인이 가사를 쓰는 건 금기였다. 격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황금찬 시인이 노랫말에 얽힌 비사를 공개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문학청년들이 김억 시인을 찾아가 유행가 가사를 쓰게 된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러자 김억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아, 나는 양복 저고리 한 개로 계절 없이 1년을 입는 사람일세. 그 한 편 써주고 돈 5원 받았네. 그 돈으로 쌀을 다 샀네. 저쪽에서 크게 부탁도 하고 살기도 어렵고 해서 그리되었으니 이해를 좀 해주게.”
그 말을 들은 문학청년들이 “선생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른 선우일선은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로 시작하는 ‘조선팔경가’(대한팔경가)도 그의 히트곡이다. 훗날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힌 김억이 가는 봄날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시가 있다. ‘봄은 간다’이다.
‘밤이도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도 가는 봄이 아쉽긴 마찬가지였으리라. 봄날은 간다.
오광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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