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뒤 소득절벽…퇴직금 떼먹는 회사 탓에 ‘벼락 빚쟁이’

권용휘 2024. 5. 1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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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후 안녕할까요…누구나 올드 푸어 <2> 청춘을 바쳤던 직장의 배신


- 불황의 그늘 “돈 없다” “기다려라”
- 수년 버텨 보지만 못 받기 일쑤
- 국민연금도 만 62세 넘어야 수령
- 노후자금 빚으로 가족생계 꾸려

- 부산 법인파산 급증… 작년 74건
- 올해는 더 늘어 1분기만 27건
- 체불 1026억 피해자 1만7209명
- 퇴직연금제 도입 적극 장려해야


중장년층이 주된 직장에서 퇴직할 때의 연령은 평균 49.4세(2023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소득대체율 42.5%에 불과한 국민연금 개시일이 만 62세(1961~64년생 기준)라는 점을 고려하면 10년 넘게 차이가 난다. 대부분은 퇴직금을 생계비로 쓰면서 소득 절벽 시기를 버텨낸다. 다니던 회사가 약속했던 퇴직금을 따박따박 준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불황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회사가 파산하거나 경영이 어렵다며 퇴직금을 주지 않으면 이 돈이 사실상 사라지기 때문이다. 부산항운노조 어류지부 장기 퇴직금 미지급 사태(국제신문 지난달 29일 자 8면 보도)가 사회 전반에 발생하는 셈이다.

▮“30년 다닌 회사에 사기당한 기분”


61세인 손준범(부산 동래구) 씨는 지난해 초 30여 년 동안 사무직으로 일했던 회사에서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지만, 아직도 퇴직금 약 1억6500만 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제때 퇴직금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5, 6년 전부터 해마다 십수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해 직원들 월급 맞추기도 빠듯할 정도로 경영 사정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먼저 나간 선배도 퇴사 후 수개 월이 지나야 겨우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후배 담당 직원에게 독촉과 읍소는 물론 호통도 쳐봤으나 돌아오는 말은 ‘기다려 달라’는 말뿐. 그렇게 1년이 넘게 지났다. 사장에게 직접 항의했으나 ‘파산시킬 수도 있다’는 은근한 협박만 들었다. 손 씨는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청춘을 바쳐 일한 회사로부터 인생을 완전히 부정당한 배신감마저 든다. 창피해서 가족에게는 아직 말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퇴직금을 기다리며 부족한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은행 대출을 하고, 기약 없는 돈을 기다리다 보니 이자는 계속 불어 은행 빚을 갚으려 다시 빚을 지는 악순환도 벌어진다.

1년 전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김진영(57·여·부산 연제구) 씨는 퇴사 후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퇴직금 1억 원은 고스란히 떼였다. 돈을 받으려 변호사와 상담해 봤으나 ‘실익이 없다’는 답만 들었다. 사무직으로만 일해온 까닭에 직장을 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고, 미혼이라 생계를 지원해 줄 배우자도 없다. 김 씨는 “아파트를 분양받느라 모은 돈을 다 썼다. 퇴직금이 노후 자금이라 생각하고 인생 계획을 짰는데, 그게 없어졌다”며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상황이라 아파트를 부동산에 내놨지만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집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파산·체임 기업 속출…노후자금이 녹는다

시니어일자리 박람회에서 채용 공모문을 살펴보는 중장년 구직자들. 국제신문DB
누구나 손 씨와 김 씨의 일을 겪을 수 있다. 팬데믹 이후 경기가 계속 어려워지면서 부산지역에 최근 파산하는 회사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12일 법원통계월보를 보면 지난해 부산회생법원에 접수된 법인파산 사건은 74건으로 전년도 48건보다 54% 급증했다. 부산회생법원이 들어서기 전인 2014년 부산지법에 접수된 해당 사건이 13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9년 사이에 약 6배나 폭증한 셈이다. 전국적으로도 지난해 지방법원 및 회생법원에 접수된 건수는 1004건에서 1657건으로 대폭 늘었다.

올해 상황은 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1~3월 부산회생법원에 접수된 파산 사건은 2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2건과 비교해 배가 넘게 늘었다. 이 추세대로라면 연 100건이 넘을 수도 있다. 폭증에 폭증을 거듭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경기가 악화하자 임금이나 퇴직금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급증한다. 우선 정부가 기업 대신 퇴직금이나 임금을 주는 대지급금 지급액이 크게 늘고 있다. 국제신문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입수한 ‘2019~2023년 대지급금 지급 실적’을 보면 부산지역에 지급된 금액만 ▷2019년 266억7800만 원 ▷2020년 273억9800만 원 ▷2021년 254억4400만 원 ▷2022년 345억3400만 원 ▷2023년 342억5800만 원으로 집계됐다. 2019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28% 늘었다. 이 기간 전국적으로는 4598억8000만 원에서 6869억500만 원으로 폭증했다.

다만 대지급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많지 않다. 임금은 3개월 치 990만 원, 퇴직금은 3년분 990만 원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다. 10년 이상 장기근속한 노동자가 대지급금만 받으면 사실상 퇴직금을 떼이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퇴직금을 떼이는 경우가 크게 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부산고용노동청이 집계한 2019년과 지난해 부산지역 임금체불액은 각각 1020억 원, 1026억 원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피해 노동자는 2만3256명에서 1만7209명으로 26.0% 급감했다. 이는 고액에 해당하는 퇴직금 체불액이 늘었기 때문으로 노동계는 보고 있다. 그러나 노후자금인 퇴직금 체불 건수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정부는 임금과 퇴직금을 분류해 집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퇴직금도 임금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에 지금까지 별도로 나눠 통계를 잡지 않았다”고 했다.

▮퇴직금 지킬 방안은 퇴직연금뿐?

회사가 파산해도 퇴직금을 온전히 지킬 방법이 있기는 하다.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회사는 퇴직금을 회사가 아닌 금융기관에 적립해야 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이런 경우 회사가 망해도 금융기관에 적립금이 쌓여 있어 적립금이 그대로 보존된다.

다만 사업주는 적립금을 부채 상환이나 사업 투자 등에 활용해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 기존 퇴직금 제도를 선호한다. 이 때문에 전체 사업장 중 26.8%(2022년 기준)만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이들 업체 대다수는 의무화되기 시작한 2016년 이후에 설립된 기업이다.

전문가들은 퇴직금 등 임금을 체불한 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은 임금체불의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징역형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다수는 벌금형으로 끝난다. 경제적으로만 보면 벌금을 내는 편이 훨씬 낫다.

반면 미국에서는 임금체불을 절도로 보고 강력한 처벌을 내린다. 뉴욕주는 2011년 임금을 체불하면 같은 금액만큼을 배상하도록 하는 ‘임금절도예방법’(Wage Theft Prevention Act)을 제정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임금 체불한 업체에 사업 중단 명령을 내리고, 위장 폐업을 하는 것을 막고자 사업을 승계한 사업주에게도 임금체불 사용자와 동일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김두현 변호사는 “임금이 밀리면 생계가, 퇴직금이 밀리면 노후가 결딴난다. 벌금형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형량이 낮아도 너무 낮다”며 “업주를 구속하고 돈을 내도록 강제하는 등 적극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했다.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떼인 임금 등을 받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대지급금 지급액을 대폭 상향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조애진 변호사는 “상한액이 현실에 맞지 않을 정도로 너무 적다. 재원이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나오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다. 대지급금을 사회보험으로 보고 국가에서 대신 퇴직금 등을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영상= 김채호 김태훈 김진철 PD

※제작지원 : BNK 부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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