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한겨레 2024. 5. 12. 15: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연결하는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을 모은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사진 국립현대미술관(정지현) 제공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저는 정원이라는 것을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 삶의 기본적인 터로서의 대지는 존중하고 보살펴야 하는 곳이기에 그 보살핌 자체가 곧 ‘정원적’ 삶의 태도가 아닐까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1941년생 할머니 조경가의 말이다.

1세대 조경가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의 삶과 작업은 한국 현대 조경 50년사의 궤적과 일치한다.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FLA)는 제15대 제프리 젤리코 상을 정영선에게 수여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정영선은 한국의 조경설계를 개척하고 선도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개념을 한국의 대지와 경관에 맞게 번역해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선유도공원 등 다수의 독보적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도시를 화해시키고 자연의 과정과 건축 환경을 연결하는 (…) 세계적 경향을 예견하고 실천했다. 동시대 조경의 핵심인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에 내재해 있었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24년 4월5일부터 9월22일까지

지난 4월5일, 정영선이 설계한 수많은 경관의 도면과 모형, 사진과 영상, 기록과 자료를 모은 전시회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했다. 선유도공원, 호암미술관 희원, 예술의전당, 아시아공원, 서울아산병원, 청계천, 광화문광장, 여의도샛강생태공원, 경춘선숲길공원,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티뮤지엄, 뉴욕 원다르마 센터 등 그의 방대한 작품 목록은 조경 직능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 자체를 예시한다.

반세기에 걸쳐 조경가 정영선이 진행한 프로젝트 중 60여개를 골라 500여점 자료를 바닥에 펼쳐놓은 전시 형식이 관람자의 숨을 멎게 한다. 투명한 유리 바닥 위를 걷거나 그 위에 앉아 그가 만든 공원과 도시 경관의 설계 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연대기적 서사로 구성한 배치가 아니라 일곱 묶음의 주제로 재구성한 방식이라 정영선의 조경 50년사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시 프로그램의 하나로 미술관 중정에 그가 직조한 야생화 정원이 관객을 환대한다.

다양한 유형의 작업을 관통하는 정영선 조경의 기반은 땅에 쌓인 시간과 이야기를 읽어내 주변 경관과 관계 맺게 하는 설계 태도다. 이러한 조경 철학을 그는 ‘지사’(地史)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한다.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독해해 설계의 조건과 잇고 엮는 태도가 그의 작업에 깊이 배어 있다.

‘땅에 쓰는 시’, 감독 정다운, 2024년 4월17일 개봉

전시 개막에 이어 4월17일에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의 정신을 강조하는 정영선의 조경을 통해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가 극장 개봉했다. 영화의 주연 역할을 하는 장소는 정영선 조경의 정점인 선유도공원이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으로 계절을 순환하며 선유도공원의 미감과 시간성을 포착한다. 그의 양평 집 들풀 마당을 플랫폼 삼아 들고나며 감독의 시선은 다른 작업들에 펼쳐진 검박한 경관 미학을 재구성한다.

“나는 ‘연결사’라고 보면 돼.” 양평 집 처마 밑에서 식재 디자인 개념을 스케치하며 정영선이 던지는 이 말은 그의 조경론을 요약하는 표현이자 영화 전체를 횡단하는 핵심 메시지다.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간명한 정의에는 ‘지사’를 연결하는 데 남다른 가치를 두는 그의 태도가 압축되어 있다. 연결의 태도는 생각과 말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형과 식물을 매개로 현실의 경관에 실천된다. 그 실천의 입체적 아카이브가 이번 전시이고 해석적 기록이 이번 영화인 셈이다.

영화 제목 ‘땅에 쓰는 시’는 관계를 엮고 맥락을 잇는 ‘연결의 조경’의 다른 표현일 테다. 다음에 옮기는 정영선의 글에서 우리는 그의 조경이 ‘땅에 쓰는 시’인 까닭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경관은 글자의 선택과 배열, 호흡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시’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이 모든 이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땅에 시를 쓰듯 설계하는 정영선의 조경 작업이 우리를, 도시를 위로한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