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기가 우등버스라면, 전투기는 레이싱카… F-4 후방석, 멀미에 구토가 밀려왔다[문지방]

김경준 2024. 5. 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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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식 한 달 앞둔 '팬텀' 직접 타봤더니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비행 코스 중 절반을 마치고 급유를 위해 대구 제11전투비행단에 착륙한 뒤 기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공군 제공

지난 9일 전투기를 탔습니다. 땅에 발 붙인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장구를 착용하고 조종석에 앉아 하늘을 날았습니다. 약 4,000피트(1.2㎞) 상공을 오르내리며 평균 시속 400㎞로, 기체가 70도 이상 기울어지는 선회 비행도 수차례, 그렇게 무려 1시간 46분 동안 대한민국 영공을 누볐습니다. 일반적인 전투기 비행 임무가 1시간 남짓이라고 하니, '무늬만 체험'의 수준은 뛰어넘었다고 봐야죠.

저의 임무는 다음 달 7일 퇴역식을 앞둔 F-4 팬텀의 고별 국토순례비행이었습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들의 정성을 십시일반 모은 방위성금 163억 원 중 71억 원을 들여 도입한 F-4D(제가 탑승한 건 후속 모델인 F-4E입니다) 5대가 신고식 차원에서 순례비행을 한 지 49년 만에 갖는 고별 순례비행입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붙여줬던 '필승편대'라는 이름도 물려받았습니다.

팬텀이 국내에 처음 도입된 건 55년 전인 1969년 8월입니다. 미국의 선물이었죠. 당시 우리 정부는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 미국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으로 한반도 위기상황이 고조되자 베트남전 3차 파병 철회를 검토했습니다. 화들짝 놀란 미국이 특별군사원조 형식으로 F-4D 18대를 우리에게 제공한 겁니다.

1975년 12월 방위성금 헌납기 F-4D '필승편대'가 국토순례 비행을 하고 있다. 공군 제공

각설이 길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겐 팬텀의 역사나 활약상보다 "그래서 전투기 타봤더니 어때?"라는 궁금증이 더 클 테니, 본격적인 체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는 공군 수원기지에서 이륙해 평택-천안-청주-울진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른 뒤 동해안을 따라 포항·울산·부산을 거쳐 거제도를 찍고 공군 대구기지에 착륙하는 코스로 비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번 구토를 했습니다. 저압 환경에 노출되면서 체내 공기가 팽창, 방귀를 연발하며 '인생 대참사'의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제가 팬텀 탑승을 위해 수원 공군 제10전투비행단에 도착한 건 오전 7시 반.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습니다. 공군 관계자는 "세븐 클리어"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고도에 따라 8등분했을 때, 지상으로부터 7단계까지 구름 한 점 없다는 뜻입니다. 특급임무를 수행하기 딱 좋은 날씨였죠.

9일 F-4E 팬텀의 국토순례비행을 하기 위해 조종사와 기자단이 격납고로 이동하고 있다. 공군 제공

먼저 사전 교육과 메디컬 체크를 받았습니다. 부대에서 챙겨준 조종사의 상징 '빨간 마후라'도 둘렀습니다. 중력가속도(G)에 의한 의식상실(G-LOC)을 막아주는 G-슈트, 구명정이 달린 하네스, 산소공급과 통신장비 연결을 위한 헬멧 등 15㎏에 달하는 장구도 꼼꼼히 챙겼습니다. 그러곤 기자 포함 8명의 조종사가 일오횡대로 '위풍당당'하게 격납고로 걸어갔습니다.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말이죠.

팬텀은 현재 주력 기종인 F-15K와 함께 우리 공군을 대표하는 2인승 전투기입니다. 전투기 4기로 편대를 편성하고, 조종사를 8명 두는 이유입니다. 저는 당연히 후방석에 탑승했습니다. 후방석 조종사는 최대 8,48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무장 탑재량을 뽐내는 팬텀의 무기통제사입니다. 레이더를 운용하고, 발사 직전까지 각종 무장을 관할하는 역할을 합니다.

격납고에 다다르자 49년 전 방위성금 헌납기의 모습을 재현한 정글무늬 도장의 팬텀이 지상 발전기를 통해 예열하면서 굉음을 내고 있었습니다. '으르릉'거리는 싸움 직전의 맹수 같았습니다. 제가 탑승한 4번기 전방석 조종사인 박종헌 소령과는 수신호로 소통해야 했습니다.

조종석에 오르는 것 자체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사전에 “탑승이 제일 걱정된다”던 김태형 10전비 153대대장(중령)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왼발부터 조심스레 사다리 7계단을 오른 뒤 전방 조종석 옆 좁은 공간을 살금살금 옆걸음으로 이동, 조종석에 앉았습니다. 각종 결속 장비들로 기체와 신체를 하나로 묶으니, 마침내 전투기와 한 몸이 됐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상태가 됐습니다. 헬멧 크기 때문에 머리 움직임도 제한됐고요. 전방석 조종사의 지시에 따라 레이더 스위치를 ‘스탠바이’로 옮겼습니다.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비행을 위해 공군 수원기지에서 이륙하고 있다. 공군 제공

캐노피(조종석 덮개)를 닫고 활주로로 진입했습니다. 속력을 내는가 싶더니 불과 8초 만에 기체가 지상을 박차고 날아올랐습니다. '어~어~' 하는 순간, 항로 진입을 위해 기체가 급선회했고, 약간의 G가 걸렸습니다. 첫 번째 고비였지만, 지난 3월 지상에서 비행환경적응훈련을 받았을 때 G-슈트 없이 6.8G까지 버텨본 저에게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G-슈트에서는 공기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공기압으로 혈액이 하체에 쏠리는 걸 막는 원리입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수원 시내가 보였습니다. 기체가 왼쪽으로 7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흥미진진했습니다. 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상하로 꿀렁거리면서 바이킹을 탈 때 느끼는 가슴 철렁거림이 수시로 느껴졌고, 선회 비행 땐 레일 아래에 매달린 놀이기구 열차를 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경험과 비교해 예를 들자면 여객기가 우등버스라면, 전투기는 레이싱카 같다고 할까요? 레이싱카가 지면의 돌멩이를 느끼듯 전투기는 기류의 오르내림을 아주 정직하게 조종사에게 전달했습니다.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비행 중 선회 기동을 실시하고 있다. 공군 제공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팬텀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을 거쳐 옛 성환 비상활주로 상공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비상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우선 태양과 가까워진 만큼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선팅 없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습니다. 헬멧의 선바이저 안으로 손을 넣어 줄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냈습니다. 전방석 조종사인 박종헌 소령은 “여름에 비행하다 보면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는다”고 했습니다.

기체의 꿀렁거림이 지속되면서 뱃멀미처럼 매스꺼움이 몰려왔습니다. 게다가 전방 시야는 계기판과 레이더 때문에 좌우 측 상부에만 손바닥 크기로 뚫려 있었습니다. 좌석 높낮이를 조정해 시야를 확보하라는 팁을 배웠지만, 실전에선 무용했습니다.

기자 : "산소 포화도 100%로 높이겠습니다."

박 소령 : "많이 힘드신가요?"

기자 : "네 토할 것 같아요."

산소포화도 100%도 그다지 도움이 안 됐습니다. 100% 산소를 포기하는 대신 마스크를 벗고 안면을 압박하던 답답함에서 해방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멀미가 다소 가시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15㎏ 장구류의 압박으로 인한 어깨와 옆구리 통증, 90도 각도의 의자에 곧게 앉은 채 온몸을 구속하고 있는 결속 장치들 때문에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구속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불편함마저 들었습니다.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비행 중 동해안 상공을 날고 있다. 공군 제공

비행 40분 만에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 상공에 진입했습니다. 캐노피 너머로 보이는 신록의 태백산맥은 장관이었지만, 산맥의 영향으로 발생한 난기류는 지금껏 참아왔던 멀미 구토를 발사시켰습니다. “구토용 비닐봉지는 꺼내기 쉬운 곳에 두라”는 김 대대장의 조언에 따라 왼쪽 팔뚝 주머니에 넣어뒀던 검정색 비닐봉지를 귀에 걸었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포항, 울산, 부산으로 향하는 동안엔 간간이 눈을 떠서 절경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미 멀미와 사투를 벌이며 1시간 이상 비행한 탓에 온몸은 녹초가 됐습니다. 차멀미를 하면 졸음이 오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까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저압 현상에 따른방귀 폭탄이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죠.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극도의 불안감까지 몰려왔습니다. 방귀 오발 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남은 정신을 끌어모아 하체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신체의 착각이었죠. 제 뱃속은 깨끗했으니까요.

거제의 조선소 상공을 지난 '필승편대'는 전투기에는 기름을, 조종사는 배를 채우기 위해 대구 제11전투비행단으로 급선회했습니다. 2차 구토 발생 지점입니다. 한 번의 울컥거림으로 끝났던 태백산맥 때와 달리 몇 분간 비닐봉지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습니다. 공군에서 상공 영상을 찍으라고 제공해 준 고프로 촬영 장비는 사치였다는 걸, 나에게 걸맞은 장비는 검정색 비닐봉지였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9일 팬텀 필승편대가 고별 국토순례비행 코스 중 절반을 마치고 급유를 위해 대구 제11전투비행단에 착륙한 뒤 기자가 다음 코스에 탑승할 동료 기자(오른쪽)에게 비행 경험을 전하고 있다. 공군 제공

이 정도만 해도 못 버틸 지경인데, 폭탄 투하를 위해 급강하와 급상승 기동을 반복하는 실제 폭격 훈련에서 조종사들이 극복했을 역경은 어느 정도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팬텀 후방석 조종사 출신인 이성진 11전비 부단장(대령)은 "공대지 무장을 투하하기 위해 오르내릴 때 후방석 조종사는 무장 통제를 위해 계속 고개를 숙이고 레이더와 계기판을 들여다봐야 한다"며 "구토감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은, 정말 엄청나게 어려운 임무"라고 설명했습니다.

영공 수호를 위해 1,000시간 이상 비행하는 조종사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필승부대'의 사진·영상 촬영을 위해 동행한 F-15K의 항공 촬영사분들도 정말 대단한 임무를 해내고 계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결론입니다. "아주 값진 경험이지만, 전투기 탑승 체험은 중력가속도내성훈련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한 번이면 족하다."

국방부 공동취재단

수원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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