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데 오만하네, 우리 회사 입사하게”…학교·농장 오가던 시골소년에게 찾아온 기회 [지식人 지식in]
‘농장 소년(farm boy)’으로 자신이 입사한 회사를 떠났다 돌아온 이 사람. 그는 테크 공룡 인텔의 부활을 이끌 수 있을까요.
이번주 ‘지식인 지식인’은 스스로를 농장 소년이라고 부르는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 입니다.
겔싱어는 농부인 부모의 넷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는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아 농부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겔싱어는 2016년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가족은 젖소와 돼지를 사육했고, 대두와 수수를 경작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겔싱어는 학교와 농장, 교회를 오가는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농장을 구입하려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겔싱어는 물려받을 농장이 없었고, 결국 다른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만약 부모가 농장을 구입했더라면 겔싱어는 인텔의 CEO가 아닌 농장주로 지역사회에 이름을 알렸을지도 모르죠.
그러던 10대 소년 겔싱어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가 다니던 학교 인근에 위치한 링컨 테크라는 전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시험에 합격해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는 재학중이던 콘래드 바이서 고등학교의 마지막 학년 수업을 포기하고 전문대에 입학합니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목가적인 분위기의 농가에서 자라 신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겔싱어는 전문대를 다니면서 컴퓨터를 처음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컴퓨터와는 매우 다른 컴퓨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겔싱어의 인생을 바꿔놓기엔 충분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겔싱어는 링컨 테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학교가 채용 박람회에 참가할 기업으로 인텔을 데려왔죠. 허니웰, IBM, 스페리 같은 대기업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인텔은 (작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서부의 기업이었죠. 박람회에서 인텔 채용 담당자였던 론 스미스를 만났는데, 제가 ‘똑똑하고, 공격적이며 오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인텔에 바로 입사하면 될 것이라고 했죠. 인텔의 초대를 받아 18세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습니다.”
인재를 알아봤던 것일까요. 인텔의 배려로 겔싱어는 학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전엔 학업, 오후에 회사로 출근하는 ‘주경야독’의 삶이 이어졌습니다. 겔싱어는 “인텔은 처음엔 산타 클라라에서, 이후엔 스탠퍼드대에서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고 회고했죠. 겔싱어는 “B학점 이하면 (인텔로부터) 수업료 지원을 받지 못할 수 있었기에 수업료를 낼 처지가 못됐던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훗날 소회를 밝혔습니다.
인텔에 입사한 그는 커리어를 계속 쌓아나가기 시작합니다. 인텔에 입사한 10대 소년은 40대 초반 인텔의 최고기술책임자(CTO)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던 중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그의 인생에 좌절이 찾아옵니다. 최고경영자 자리를 코앞에 두고 회사를 나가야만 했던 것이죠.
2009년 인텔은 사업부문을 병합하고 경영진에 변화를 줄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이 결정으로 겔싱어는 인텔을 떠나 데이터 저장 장치 제조업체인 EMC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겔싱어와 CEO 자리를 놓고 경쟁구도에 있던 영국 출신 션 멀로니가 인텔 수석 부사장으로 화려하게 부상했죠.
멀로니 역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서운 훈련 조교’ 스타일이었던 겔싱어의 멘토로 알려진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을 3년 간 보좌하며 살아남았기 때문이죠. 멀로니는 영업·마케팅 그룹 총책임자, 최고영업·마케팅책임자를 거치며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멀로니와의 경쟁에서 밀린 겔싱어는 30년 간 몸담은 인텔을 떠납니다. 비록 인텔은 아니지만 EMC에서 그는 CEO로서의 능력을 키우게 됩니다. EMC에 이어 가상화 전문업체인 실리콘밸리 소재 VMWARE의 CEO를 거친 그는 인텔을 떠나게 된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겔싱어가 인텔을 떠난 후 멀로니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멀로니를 대신한 사람이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인텔 최고운영책임자였는데, 비용절감 철학을 앞세운 그의 경영 방침으로 인해 결국 인텔은 경쟁자들에게 따라잡히고 추월당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스캔들로 인해 크르자니크가 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인텔은 고심 끝에(로 쓰고 ‘돌고돌아’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결국 겔싱어에게 손을 내밀게 됩니다.
지난달 25일 인텔은 1분기 사업 매출이 44억달러로 전년 동기 48억달러 대비 약 8% 감소했고, 적자는 25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죠. 겔싱어 CEO는 “파운드리 사업 적자가 올해 최대치를 기록한 뒤 2027년 손익분기를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겔싱어로서는 엔비디아와의 힘겨운 경쟁도 이어나가야 합니다. 인텔의 역대 경영자들이 기회를 연달아 놓치면서 인텔의 시장 가치는 엔비디아의 16분의 1 수준까지 추락했습니다.
CNBC는 이를 두고 “미국에서 가장 큰 칩 회사였던 인텔이 최근 몇 년간 일련의 헛발질로 수많은 라이벌들에게 추월당했다”고 분석했습니다. 2007년 애플 아이폰 출시 이후 붐이 일었던 모바일 칩을 놓친 것이 가장 큰 실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죠. AI 학습에 CPU보다 적합한 GPU가 널리 채택된 것도 인텔로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인텔의 시가총액은 2000년대 초 2700억달러, 2020년 2920억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추락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총은 최고점 대비 절반 수준인데, 같은 기간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이 2조1930억달러인 것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인텔이 오는 6월 한국에서 AI 서밋을 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AI 개발 붐이 일면서 IT 업계에선 주요 기업들 간 합종연횡이 발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정 기업 홀로 AI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연합군을 이뤄 대응해보겠단 생각이죠.
‘인텔 AI 서밋’은 전 세계를 돌며 1년에 여러 차례 열립니다. 현지 법인을 중심으로 열리는 행사로 CEO가 직접 참석해 연설하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죠. 6월 국내 행사엔 최수연 네이버 대표를 비롯해 삼성전자 고위 임원도 참석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겔싱어 CEO는 인텔의 부활을 이끌 수 있을까요? AI 개발 경쟁 속 한국 기업들의 몸값도 덩달아 높아지는 가운데, 6월 방한을 앞둔 그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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