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졸업은 왜 의대 우회 진학 통로가 됐을까 [김유나의 풀어쓰는 교육 키워드]

김유나 2024. 5. 1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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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조기졸업
교육 정책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고 계신가요? ‘김유나의 풀어쓰는 교육 키워드’는 최근 교육 기사에 자주 쓰이는 단어의 의미와 관련 논란에 대해 교육부 출입기자가 설명하는 연재 기사입니다.
 
최근 입시업계의 이슈 중 하나는 ‘의대 블랙홀’입니다. 의사는 오래전부터 사회에서 선망받는 인기 직종이었지만, 최근에는 ‘쏠림 현상’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선호도가 높아졌습니다. 비교적 정년에서 자유롭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 등이 이유로 꼽힙니다. 이는 이공계의 문제와도 맞닿아있습니다. 성적이 잘 나와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는 학생에게 의대가 아닌 이공계열 학과는 의대만큼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내의 한 의과대학. 연합뉴스
이 같은 의대 쏠림 현상의 영향을 받는 곳 중 하나는 과학고등학교입니다. 과학고는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로, 현재 전국에 20개교가 있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키우는 곳인 만큼 일반 고교보다 세금도 더욱 많이 투입됩니다. 학생에게 지원되는 장학금은 개별적으로 달라 집계가 쉽지 않지만, 1인당 연간 500만원가량이 지원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 인재 양성’이란 설립 취지와 달리 의약학계열에 진학하는 과학고 졸업생이 늘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습니다. 세금을 들여 의대생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자 2021년 전국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공동으로 ‘의약학계열 진학 제재방안’을 마련했습니다. 2022년 입학생부터 의약학계열에 진학할 경우 교육비·장학금을 반납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입학 시 의약학계열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는 등 정부는 영재학교·과학고 출신의 의약학계열 진학 제재 수위를 높인다는 방침이지만, 영재학교·과학고 출신의 10%는 여전히 의약학계열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올해 서울대 의대 정시 합격자 40명 중 10명이 영재학교·과학고 출신으로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의약학계열 진학 제재의 불똥은 ‘조기졸업’에도 튀었습니다. 과학고 재학생은 2학년 과정까지만 마치고 고교를 졸업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효율적인 과학 인재 양성을 위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기졸업이 의대 입학의 우회 통로로 활용된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조기졸업 후 일단 다른 대학에 갔다가 1년 뒤 의대에 가는 학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과학고를 졸업해 바로 의약학계열에 가면 불이익이 있지만, 조기졸업 후 다른 대학에 갔다가 대입에 다시 도전해 의대에 갈 경우에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학생 입장에선 조기졸업을 하면 1년을 버는 셈이어서 재수를 하더라도 조기졸업 하지 않은 학생과 똑같은 나이에 의대에 가게 됩니다. 

이에 과학고의 조기졸업 요건도 까다롭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최근 20개 과학고는 공동으로 조기졸업 요건 개선안을 내놨습니다. 조기졸업은 (1)학업성취도, 지능검사(IQ), 경시·경연대회 입상 경력 등 교육감이 정한 조기졸업 요건을 채우거나 (2)조기졸업 요건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조기입학이 가능한 대학(한국과학기술원(KA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 이공계 특성대학)에 합격하면 가능합니다. 

과학고가 마련한 개선안은 현재 20%(단, 서울·경기 10%, 경남 15%)인 학업성취도 요건은 15% 이내로, IQ는 140에서 145 이상으로 강화됩니다. 대학 조기입학 요건도 학업성취도 40% 이내에서 30% 이내로 줄어듭니다. 이런 개선안은 내년에 입학하는 학생들부터 적용될 예정입니다.

교육부가 정책연구 등을 통해 검토한 결과 이렇게 요건이 강화되면 현재 약 30%인 조기졸업생 비중은 20% 수준으로 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각 학교는 저 기준 안에서 더욱 강화된 요건을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조기졸업 규모를 줄인다는 방침이어서 향후 요건은 더욱 까다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도 듭니다. 조기졸업을 줄이고, 서약서를 받고, 장학금을 환수하기까지 하면서 과학고 학생들에게 ‘의대에 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하는 현실이요. 의대에 진학한 과학고 졸업생 모두 처음부터 의사가 될 마음을 먹고 과학고에 입학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한때 과학자의 꿈을 꿨으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공계열이란 또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주지 못한 정부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요. 정부는 의대를 택하는 이들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이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 의대 정원 증원 방침이 나오면서 주요 대학 이공계열 교수들의 걱정이 크다고 합니다. 의대 입학 기회가 늘어난 것인 만큼, ‘반수’를 해 의대로 빠져나가는 학생이 급증할 것이란 거죠. 2학기엔 강의실이 텅 빌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이들이 모두 고귀한 소명의식 때문에 의대를 택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현재 학생들에겐 이공계의 미래가 밝아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의대 아닌 다른 선택지를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그래서 과학고 학생들에게 더이상 의약학계열 진학 제재방안을 들이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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