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세계 곳곳 전쟁과 경제난, 여전히 돈키호테 정신 필요”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5. 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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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돈키호테가 살아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를 어떤 도전하는 캐릭터로, 실제 살아있는 인물로 생각하면서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고, 캐릭터의 힘이다. 돈키호테 같은 멋진 캐릭터를 만들길 바란다.

심사위원장이었던 소설가 이순원은 연단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돈키호테 이야기를 거론하며 격려사를 했다.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김호연 작가는 2013년 봄 시상식장에 앉아 있다가 이 같은 격려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맞아, 내가 돈키호테 같은 인물과 이야기를 좋아했었지. 그는 어린 시절 문고판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문득 완역판으로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완역을 한 번 제대로 읽어보자. 가능하다면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장편도⋯.

시간은 흘러서 2019년 9월, 『돈키호테』 완역판을 모두 읽은 그는 한국 토지문화재단과 스페인 문화활동국립협회(AC/E)간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입주 작가로 선정돼 3개월간 스페인에서 레지던시를 했다.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세르반테스 축제에도 참여했고, 『돈키호테』 낭독극도 봤으며, 세르반테스의 생가와 그가 생전 갇혔던 감옥도 둘러봤다. 이렇게 두 달여 취재를 한 뒤 현지에서 소설을 구상했다.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있고, 이 돈키호테 같은 사람을 기억하는 몇 사람이 그를 추적하는.

곧바로 집필을 하고 싶었지만, 여건도 되지 않았고 개인적 준비 역시 덜 돼 있었다. 팬데믹이 닥쳐와서 영화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생계에 도움을 주던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먼저 콤팩트한 작품을 한 편을 쓴 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쓰기로 생각을 바꿨다. 2021년, 그는 그동안 경험이 많은 동네 및 편의점을 모티브로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발표했다. 작품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불편한 편의점 2』까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이런저런 상황과 계기로 미뤄져온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열정이 샘솟았다. 더구나 스페인 레지던스 생활을 후원한 AC/E와의 약속도 있지 않았던가. 그는 2022년 겨울부터 스페인에서 쓰기 시작한 작품 구상안을 마무리한 뒤 곧바로 집필에 착수했다.

집필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부담감이 힘들었다. 전작인 『불편한 편의점』에 큰 사랑을 보내준 독자들을 가능하면 다음 작품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어려운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물론 그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소설이 아닌 대중적인 화법으로 따뜻하고 편하게 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에 편의점이라는 콤팩트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전작과 달리,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이번 작품은 작품적으로 사이즈가 훨씬 컸다.

“시간적으로 15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하고, 공간적으로도 대전과 서울, 스페인까지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아직은 친숙하지 않은 30대 여성 주인공에, 많은 인물이 나오고, 『돈키호테』 원전까지 패러디해야 했어요. 대전이라는 공간을 취재하고 유튜버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했지요. 외적으로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작품 내적으로 여러 압박과 유혹에서 벗어나 쓰고 싶은 것을 온전히 써야 했습니다. 작가 역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도 문학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선 돈키호테처럼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썼죠.”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김호연이 최근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15년의 시간을 오가는 젊은이들의 꿈과 모험을 담은 신작 『나의 돈키호테』(나무옆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로, 『불편한 편의점 2』 이후 2년 만이다.

2018년 늦가을, 외주 프로덕션 6년차 피디 진솔은 자신이 기획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리고 고향 대전으로 내려온다. 피디 경력을 살려서 유튜브를 하기로 생각한 솔은 대전을 소재로 아이템을 구상하던 중 이제는 카페로 바뀐 비디오 가게에서 우연히 한빈을 만나게 된다. 솔은 돈 아저씨의 아들 한빈에게서 아저씨가 거처했던 지하 공간은 그대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실을 함께 찾았다가 자신을 ‘산초’라 부르며 늘 응원해 주던 아저씨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흰색 바탕에 빨간색 글씨의 비디오 가게 간판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놓여 있었다. 나는 간판 속 일곱 글자를 나직이 읊조렸다. 돈. 키. 호. 테. 비. 디. 오. 굴림체 글자 테두리마다 새카맣게 쌓인 먼지가 일부러 만든 음영처럼 보였다. 마지막 글자 ‘오’의 절반은 플라스틱 커버가 뜯겨 내부 형광등이 보였는데, 금방이라도 거기서 빛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돈키호테 비디오가 오래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왜 이제 왔냐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잊었냐고, 산초 없는 돈키호테가 무슨 소용이냐고 책망이라도 하는 듯했다.”(36쪽)

그러니까 15년 전 2003년 ‘돈키호테 비디오’는 솔을 비롯한 몇몇 동네 중학생들의 아지트였다. 스스로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가게 주인 돈 아저씨는 솔을 비롯한 아이들과 함께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여행을 가면서 아이들이 각자 꿈을 얻고 키워서 세상에 나가기를 응원했다. 돈키호테가 정의를 세우겠다는 꿈 하나로 모험을 떠나듯.

솔은 한빈의 요청에 따라 돈 아저씨의 지하 공간을 배경으로 그 시절에 봤던 책과 영화를 소개하고 아저씨를 찾는 유튜브 ‘돈키호테 비디오’를 시작한다. 한빈과 티격태격하면서도 함께 돈 아저씨의 삶과 행방을 차례로 추적해 나간다. 대학 시절 룸메이트 동창 권영훈 사무장, 강남 학원강사 시절의 동료, 마포 출판사에서 함께 일했던 편집자 김승아씨, 시나리오 계약을 한 영화사 대표 석명환, 영화사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시나리오 개발한 민주영 피디⋯.

“돈 아저씨를 찾는 이 여정은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의 성장 서사와 닿아 있으며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모험이기도 했다. 처음 돈키호테 비디오의 간판이 놓인 이 공간과 재회한 순간 아저씨가 몹시 그리워졌고, 그를 추억하고 추적하면서 유튜브 채널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유튜브를 떡상시키고 싶어 돈 아저씨를 찾는 건 아니다. 아저씨를 만나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 이유를 스스로 알아가고 구독자들에게도 납득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160~161쪽)

돈 아저씨는 왜 3년 전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일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돈 아저씨를 추적하고 찾아가는 시리즈는 구독자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며 채널의 대표 콘텐츠로 인기를 얻는다. ‘찐산초’ 솔은 마침내 돈 아저씨를 찾을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아내지만, 그것은 모험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었으니.

“‘바로 이 감옥에서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무언가를 떠올리지. 그게,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아주 길고 매우 판타스틱한 그 이야기잖아. 그치?’ ‘맞아요.’ ‘⋯여기 꼭 와보고 싶었단다. 『돈키호테』가 잉태된 이곳, 세르반테스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보낸 이곳이 내게 용기를 줄 수 있겠더라고.’ ‘어떤 용기요?’ ‘네가 말한 그 돈키호테의 열정. 어쩌면 광기. 그러니까 싸울 수 있다는 용기. 정의와 자유를 위해 거악에 맞서는 선한 힘이라는 용기.’”(384~385쪽)

돈키호테를 쫓는 돈 아저씨와 그 아저씨를 쫓는 찐산초 솔의 이야기는 15년의 시차를 오가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숨바꼭질과 우정, 돈키호테와 산초와 세르반테스가 뒤엉키고 넘실거리는 모험과 성장 서사로 내달린다.

밀리언 독자들이 사랑한 『불편한 편의점』의 작가 김호연이 형상화한 우리 시대의 돈키호테와 산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진지하고 야심만만한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 2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돈키호테를 찾아 나선 돈 아저씨와, 이 돈 아저씨를 찾아 나선 솔의 추적 여로라는 스토리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먼저 돈키호테 같은 사람을 설정했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면서도 세상의 정의를 위해 약간 오버도 하는 돈키호테 같은 삶을 살다가 좌절해 비디오 가게를 차린 아저씨로 설정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디오 가게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과거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시절 비디오 가게에서 추억을 쌓은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당시 중2 소녀로, 이제는 씩씩한 30대의 약간 보이시한 여자 주인공을 생각했다. 다만 주인공이 아저씨를 추적하는 방식은 요즘 젊은이들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유튜브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유튜버가 되려면 방송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방송을 외주 제작하는 피디였다가 잘리는 인물로 설정했다. 주인공이 돈 아저씨를 찾아나서는 것이 1장, 여러 추적과 과정을 거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 2장, 다시 두 사람이 스페인으로 가고 새로운 여로를 찾아 나서는 3장 구조로 설정하고 풀어나갔다.”

―돈 아저씨와 솔의 관계는 15년 사이에 묘하게 역전하는데.

“돈 아저씨는 처음에는 공부와 세상에 힘들어하는 솔에게 꿈과 희망을 주면서 응원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당시 그 역시 일도 잘 풀리지 않고 이혼도 하고 힘들었지만 솔과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솔을 비롯해 아이들이 반대로 아저씨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영감을 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정이다. 실제 소설 『돈키호테』에서도 돈키호테와 산초와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편에서는 돈키호테가 산초에 자극을 주지만, 2편에선 오히려 산초가 돈키호테에 자극을 준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우정과 영향을 돈 아저씨와 솔의 관계로 대비시킨 것이다. 솔은 산초로 출발했다가 레이디 돈키호테가 돼 간다.”

―주요 인물들이 소설 『돈키호테』의 인물과 매치가 돼 재미를 더하는 것 같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는 원전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온다. 로시난테는 돈키호테의 말인데, 일종의 운송 수단이어서 전거포 할아버지로 설정을 했고, 돈키호테에게 영감을 주는 캐릭터 돌시네아의 경우 약간 4차원적인 아이에게 맡겼다. 자의적인 매치업인데, 조연들이 너무 부각되지 않고 돈키호테와 산초 중심으로 전개되도록 했다. 원전을 읽은 분들은 어디를 패러디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고, 읽지 못했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감초 같은 역할의 한빈과 건물주가 되는 성민이라는 인물도 인상적인데.

“한빈과 성민 모두 돈을 밝히는 젊은 세태를 그리고 있다. 다만 한빈은 돈을 밝히면서도 잔머리만 굴리다가 잘 안 되는 경우이고, 성민은 재테크 플랜을 잘 짜서 경제적 자유를 얻는 데 성공한 경우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열리는 2000년대 초반이 시대적 배경을 이룬다.

“돈 아저씨나 솔의 캐릭터를 잡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 시대가 들어왔다. 82학번인 돈 아저씨는 시대정신으로서 학생 운동에 가담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와 출판사 일을 전전하다가, 200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맞아 영화계에 뛰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에 30세가 되는 솔 역시 중학생 2학년으로 돌아가면 2003년이 된다. 한국 영화의 중흥기와 겹쳐진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은 영화 「쉬리」, 「8월의 크리스마스」, 「공동경비구역」, 「친구」,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등이 쏟아지면서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열리는 시기다. 강우석의 시네마 서비스, 차승재의 싸이더스, 심재명의 명필름 등 제작사가 오직 꿈과 열정으로 좋은 한국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였다.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던 돈 아저씨가 2000년대 초라면 영화의 세계에 빠졌을 것 같았다. 실제로 제가 아는 영화인 가운데 상당수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박광수 감독 등 86그룹 출신이다.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 같다. 저 자신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사에 입사해 영화 「이중간첩」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해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를 경험한 영화인 출신이다. 다양하고 좋은 한국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인프라와 노하우, 건강함이 살아 있던 2003년을 얘기하고 싶었다. 한국 영화에 바치는 오마주 또는 헌사다.”

―대전과 스페인, 비디오 가게라는 장소성 역시 강력한데.

“『돈키호테』는 기본적으로 계속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만나게 되는 로드 소설이다. 돈키호테의 무대가 되는 라만차 지역은 스페인의 중남부 지역으로, 한국으로 보면 대전쯤 위치한다. 더구나 라만차가 평원인데, 대전 역시 큰밭이라는 이름처럼 평원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요즘 서울과 수도권만 부각되는데, 대전을 비롯해 많은 지역에도 멋진 삶들이 있다. 특히 2016년 카이스트에서 스토리텔링 워크숍을 진행하며 6개월간 레지던스를 한 경험이 있다. 그때 대전이 지역색이 강하지도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따뜻하다고 느꼈다.”

―돈 아저씨로 상징되는 돈키호테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국내에선 제2의 IMF가 올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기가 침체돼 있어서 꿈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꿈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꿈이나 희망, 이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어서 힘들 수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불행하더라. 사람이 돈만 잘 벌고 윤택하게 산다고 행복하지 않다. 부자여서 행복한 게 아니라 자신의 꿈을 이뤘거나 자기가 여전히 지향하는 목표나 꿈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꿈을 이루는 데에 꼭 돈만 필요한 게 아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한다. 망상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돈키호테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번 작품은 작품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가 따뜻한 휴먼 스토리를 많이 써왔는데, 그 동안의 작업을 총망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만차 클럽 멤버들과 돈 아저씨의 우정은 첫 장편 『망원동 브라더스』에 그려진 우정을 떠올리게 하고, 대전에서 시작해 서울, 통영, 제주를 거쳐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로드 소설 『연적』 속의 두 라이벌 여행을 연상시킨다. 돈 아저씨가 싸운 대리 번역 문제는 『고스트 라이터즈』의 세계와 겹치고, 고전 서사를 모티브로 삼은 것은 괴테의 소설에 영감을 얻어 쓴 『파우스터』와 연결된다. 특히 비디오 대여점은 『불편한 편의점』의 ‘올웨이즈 편의점’과 닿아 있다. 그 동안 썼던 소설 작품들의 주요한 테마나 글쓰기, 톤과 매너가 총망라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제 인생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래 준비를 했다. 다음에는 좀 더 신선하고 색다른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다.”

소설을 출간해 팔아야 하는 출판사 소설팀장 김호연은 국내 작가들의 섭외가 쉽지 않아서 주로 일본 소설을 번역 출간했다. 첫 직장인 영화사에서 영화 「이중간첩」에 참여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 그는 2년 뒤 출판사 편집자로 전업했고 다시 2년 뒤부터 소설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출판 시장은 영미 작가들의 장르소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등을 앞세운 일본 대중소설이 휩쓸고 있었다. 해외 작가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거액을 주고 판권을 사야만 했다.

“왜곡된 출판 시장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출판 편집자 시각에선 외국 작가들에게 우리 독자들을 뺏기고 있었으니까요. 대중소설 시장이 큰데, 국내 작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요.”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 작가들이 대중소설을 많이 쓰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가장 안타까웠다. 물론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이나 『남한산성』을 쓴 김훈 등 일부 작가는 장르적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 대중소설을 쓰고 있었지만, 대다수 젊고 유망한 작가들은 대중소설보다 문학성이 강조된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국내 작가들도 재밌게 읽히는 대중소설이나 미스터리나 스릴러, SF 등 다양한 장르소설을 쓴다면 우리 독자를 빼앗아올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나라도 써볼까.

대학 시절 소설 작법을 배우지 못한데다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해서 영화사와 출판사에서 일해 온 그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삶을 꿈꾼 문학 소년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운동이나 기계 조립 등의 취미 대신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취미를 묻는 항목에는 늘 독서라고 적었고, 놀이공원 대신 도서관이나 새로 리뉴얼한 교보문고를 찾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책을 즐겨 읽는 한편, 영화를 좋아했다. 자율학습이 끝나거나 주말에는 충무로 대한극장이나 명동의 중앙극장, 명보극장 등으로 내달려 「로봇캅」, 「시네마 천국」, 「죽은 시인의 사회」 등 많은 영화를 눈에 담았다.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 했지만, 예체능 실기 시험을 따로 봐야 해서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에 가입해 비디오를 찍고 영화의 빠졌지만, 그럼에도 문학과 작가들의 세계를 떠나진 않았다. 황석영, 이외수, 이문열, 조정래, 윤대녕,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김영하⋯. 졸업반 시절 즈음에는 작가 폴 오스터가 들어왔고.

어느 순간, 시나리오 작가 출신 출판사 소설팀장 김호연은 대중소설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대중소설을 써서 외서에 빼앗긴 소설 시장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2007년 1월, 그는 대중소설을 쓰기 위해서 출판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소설가가 되는 길 역시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틈나는 대로 계속 소설을 썼다. 소설가 데뷔를 위해 세계문학상을 비롯해 문학동네소설상과 창비장편문학상 등 각종 장편공모전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무명작가 생활이 6년이나 이어졌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가 김호연의 원점이었다.

1974년 서울에서 자영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김호연은 2013년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7년간의 무명작가 생활이 끝나는 순간으로, 그의 나이 만 서른아홉이었다. 이후 『연적』, 『고스트라이터즈』, 『파우스터』, 『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2』 등을 발표했다.

―작품 세계를 조금 정리하면.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는 소시민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다양하고 유니크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고, 장편소설 『연적』이나 『고스트라이터즈』는 좀더 유니크한 이야기를 담았다. 『파우스터』는 정통 스릴러 작품이다. 주로 소시민이나 루저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권력이나 강자에게 저항하거나 푸념하는 내용을 주로 다룬 것 같다. 소시민이나 루저들이 반역까진 아니지만 자기들 방식으로 이 세상에 맞서고 저항하고 살아내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불편한 편의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데.

“최근엔 소설을 쓰느라 거의 못썼다. 소설은 더 내밀하고 제 자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소설은 제 이야기를 완성하기 더 쉬운, 저에게 더 유리한 방식이다.(소설과 시나리오간 공통점이나 차이는) 기본적으로 장편 대중 소설과 상업 시나리오의 스토리텔링 공식은 같다. 2시간 안에 혹은 300페이지 안에 독자를 클라이막스로 올렸다가 내려오게 하는 롤러코스터 방식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포크너를 비롯해 영미권이나 일본에서 많은 작가들이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오래 전부터 극작가들을 고용했는데, 극작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3장 구조를 주로 썼다. 스토리텔링 작법은 여러 가지인데, 3장 구조로 풀기도 하고, 8장이나 16장 시퀀스로 풀기도 한다. 다만 이야기 사이즈나 산업적 방식에 따라 시나리오나 소설로 구분돼 쓰여야 한다. (두 가지의 차이는) 투자 규모다. 영화는 일정한 사이즈가 있어야 한다. 남산타워가 무너지거나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라면 영화로 가야하고, 「고도를 찾아서」처럼 남자 둘이 여관방에서 하루 종일 떠드는 이야기라면 영화보다는 소설로 가야 한다. 시나리오는 문체가 없고 오히려 객관적이어야 하는 반면, 소설은 자기만의 문체와 작품에 대한 작가 지향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소설의 문체와 톤, 매너가 작가의 연출이다.”

―장편쓰기 전략이나 원칙, 방법 등이 있다면.

“영화도 상업 영화가 있고 예술 영화가 있듯이, 소설도 대중 상업소설이 있고 작품성을 지향하는 예술 소설이 있는 것 같다. 저는 대중 상업소설을 쓰기 때문에 대중들이 익숙한 장르와 장편 상업 서사의 플롯을 적용해 쓴다. 예를 들면, 독자들이 캐릭터에 빨리 공감하도록 장치를 초반에 두고, 메인 사건은 이야기 5분의 1지점에서 터지도록 한다. 관람자들이 2시간짜리 영화를 볼 때 1시간 동안 주인공에게서 메인 사건이 안 일어나면 이게 예술 영화인가 하고 당황하듯, 책 역시 절반이 다되도록 주인공이 산책만 하고 주요 사건이 안 일어나면 집중도가 떨어진다. 사건은 정확한 시간에 터져줘야 한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구조를 생각하고 써야 한다. 문체는 잘 읽히는 문체, 가독성을 중시한다. 3, 4시간 동안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게 목표이기에 제일 중요한 건 가독성이다. 문학적 성취와 가독성을 둘 다 잡으면 대작가이지만, 저는 둘 모두를 하기 쉽지 않아서 가독성을 우선 선택한다.”

―작품 또는 작가로서의 포부나 비전은.

“소설이든 대본이든, 기조를 잃지 않고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 소재가 영화에 어울리면 영화 시나리오로, 소설에 어울리면 소설로 쓰면 된다. 다만 지금은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됐기에 좋은 소설을 좀 더 쓰고 싶다. 독자들과 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소설을 쓰고 싶다. 대본 작가의 정체성도 있으니까 좋은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싶다.”

―최근 일상에 변화는 없는가.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불편한 편의점』이 잘 돼서 해외 독자를 겨냥한 활동이 적지 않다. 『불편한 편의점』이 일본 서점대상 3위를 기록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상당히 알려지고 있는 것 같다. 대만에서는 『망원동 브라더스』에 이어 『연적』 출간을 앞두고 있다.”

단단한 몽돌 같은 모습의 김호연은 인터뷰에서 “마치 공무원처럼” 꾸준히 글을 써나갈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전 6, 7시쯤 일어나 산책이나 운동을 하고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오전 9시나 10시쯤이면 무조건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서너 줄도 좋고, 한 페이지도 좋다고.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고, 쳇바퀴가 돌듯 쓰고 또 쓴다고. 인터뷰 내내 그는 진지했고 열정이 가득했다. 마치 광기의 돈키호테처럼, 그 돈키호테를 쫓는 돈 아저씨처럼⋯.

“말을 마친 아저씨가 잔을 들고는 외쳤다. ‘바모스!’ 다들 아저씨를 쳐다봤다. ‘스페인어로 가자라는 뜻이지. 우리말로 파이팅! 하는 거랑도 비슷하고. 자, 다 같이⋯바모스!’”(362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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