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나무·난초에 ‘아낌 없이 주는 나무’ [ESC]

한겨레 2024. 5. 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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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튤립나무
메릴랜드 숲 이루는 중요 생물
죽어 분해된 뒤에도 영양분으로
튤립 닮은 꽃은 통째로 떨어져
미국 메릴랜드 숲속에 핀 튤립나무의 꽃.

5월 메릴랜드의 숲속은 봄꽃들이 사그라지고 새싹이 반짝반짝 솟아난다. 연둣빛 물결 속을 걸으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담한 꽃송이들이다. 튤립나무의 꽃이다. 튤립나무는 이맘때 꽃이 피는데 나무가 워낙 높이 자라다 보니 꽃이 핀 줄 모르고 놓치기 일쑤다. 떨어진 꽃을 발견하고서야 꽃이 피는 시기임을 깨닫고 높은 가지 끝을 올려다보게 된다.

한국에서는 튤립나무가 자생하지 않아서 야생에서 볼 수 없고 정원수로 드물게 만날 수 있다. 내가 다닌 대학에는 튤립나무가 있었다. 학교를 세운 미국 선교사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교수님이 알려주셨다. 나는 튤립나무가 필 때면 높은 학교 건물에 올라가 꽃이 피었는지 확인하곤 했다. 멀리서 조그맣게 피어 있는 걸 종종 발견했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한 적은 없었다. 한국에서 튤립나무를 만나기 힘들다 보니 꽃이 져서 사라지는 모습, 암술이 열매로 자라나 씨앗을 맺는 과정, 나무에 찾아오는 동물 등 다양한 순간을 함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메릴랜드에서는 튤립나무가 숲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여서 전 생애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다.

튤립은 백합과, 튤립나무는 목련과

튤립나무의 꽃은 튤립과 닮았지만 색과 형태가 더 우아하다. 알록달록한 튤립과 달리 초록색과 옅은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고 안쪽으로 가면 짙은 귤색, 혹은 주홍색 문양이 있다. 튤립나무는 튤립과 컵 모양의 꽃잎 형태는 비슷하나 꽃 속의 수술과 암술은 전혀 다르다. 튤립은 백합과로 세 개로 갈라진 암술과 여섯 개의 수술이 드러나지 않고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에 목련과인 튤립나무는 꽃 속에 많은 수술과 암술이 있다. 암술은 촘촘히 모여있고 가늘고 긴 수술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펼쳐져 있다. 주홍빛 문양과 가느다란 수술이 섬세하게 어울린다. 암술은 그 모양 그대로 자라나 뾰족뾰족한 왕관 모양의 열매가 된다. 얇은 날개가 달린 씨앗들은 안쪽부터 떨어져 가장자리에만 남기도 하는데 중앙에 남아있는 뾰족한 열매 축과 조화를 이뤄 그 형태가 꼭 고전적인 촛대 같다. 꽃이 질 때 꽃잎이 젖혀져 형편없는 모양으로 떨어져 버리는 튤립과 달리 튤립나무꽃은 떨어질 때도 고상한 모습을 유지한다. 꽃잎과 수술이 흩어져 떨어지기도 하지만 동백꽃처럼 통째로 떨어지기도 한다.

가끔 잎사귀와 함께 가지째 떨어진 것은 마치 새로운 꽃이 땅에서 피어났다가 스러진 것 같다. 키 큰 나무의 가지 끝에서 피어났다고 느껴지지 않고 처음부터 땅에서 솟아난 튤립이 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이면 꽃들이 모두 비바람에 스러진 것 같아서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한국에서 온 내게 처음 본 튤립나무 숲은 정말 이색적이었다.계절에 따른 매 순간이 신기했고 특히 5월에 여기저기 꽃송이가 떨어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정말 신비로웠다. 튤립나무꽃이 떨어져 분해되고 흙 속에 스며드는 과정도, 빗물에 쓸려 내려가 가득 모여있는 꽃잎들도 모두 아름다웠다. 어떤 식물이 있는지에 따라 그곳의 풍경은 끊임없이 그 식물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한 자리에 오래도록 자라는 나무가 쉼 없이 자아내는 풍경과 나눔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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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있는 오랜 친구

연구소 근처에 있는 아나폴리스는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1600년대는 청교도가 이주해 정착했고 1700년대에는 미국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아나폴리스에는 메릴랜드 주의회 건물이 있는데 1층에는 메릴랜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된 작은 나무 상자에 새겨진 튤립나무 문양을 본 적이 있다. 메릴랜드 사람들에게 튤립나무는 어떤 존재일까? 튤립나무는 이곳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는 인간뿐 아니라 다른 주변 생물과 생태계도 바꾼다. 우리 실험실에서는자생 난초를 연구할 때 튤립나무 가지를 갈아서 난초를 키우는 영양분으로 사용하곤 한다. 튤립나무는 숲을 이루는 주요한 생물이고 나무가 죽어 분해되고 숲속에 흩어져서도 계속 숲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생태계의 순환을 관찰하고 우리는 튤립나무를 갈아 실험에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무 아래 키 작은 식물들은 분해되고 썩은 튤립나무를 먹고 자라난다. 난초도 그렇다. 난초는 튤립나무 아래에서 자라며 나무와 흙을 공유하고 분해된 튤립나무를 영양분으로 사용한다. 난초를 도와주는 곰팡이 또한 튤립나무와 도움을 주고받는다. 한번은 떨어진 튤립꽃을 주워 그 속을 살펴본 적이 있다. 두 마리의 달팽이와 개미들이 꽃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달팽이와 개미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풀숲에 다시 꽃을 내려놓았다. 오래된 튤립나무가 있으므로 난초도, 곰팡이도, 달팽이도, 개미도, 우리도 함께 숲의 풍경 속에 녹아든다.

나는 최근 한국에 잠시 돌아와 부모님과 여러 곳을 여행했다. 우리는 고택을 많이 방문했는데 그 고택 옆에는 늘 그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가 있었다. 세연정의 동백나무, 공재고택의 당종려, 위양지의 이팝나무, 월연정의 배롱나무, 반호정사의 느티나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나무를 보면서 어떤 추억을 남겼을까? 아마도 그들에게 나무는 인생의 오랜 친구 같은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본 5월의 단편적 모습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긴 인연 말이다. 꽃과 열매, 새싹과 단풍, 찾아오는 동물들을 속속들이 알고, 어쩌면 그 나무로부터 얻은 꽃·열매·잎사귀로 자신만의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무 주위를 돌거나 나무 기둥에 기대며 부러진 가지를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비밀을 나누었을 것이다. 튤립나무, 동백나무, 당종려, 이팝나무, 배롱나무, 느티나무 등 각각의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며 계속 자라난다. 그리고 나무가 거기 있으므로 그곳에 있는 모두가 운명공동체가 된다.

글·사진 신혜우│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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