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히는 가족과의 단절, 정당방위인가

김신성 2024. 5. 1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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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얼굴 보고 많은 시간 공유하지만
기대만큼 상처주기 쉬운 관계가 ‘가족’
신체·정서적 학대 등 괴롭힘 당했거나
단절 후 생활서 오는 고통에 몸부림도
심리학자가 전하는 나를 해방시키는 법
“스스로 정한 경계선을 굳건히 지켜야”

가족을 끊어내기로 했다- 내 발목을 잡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죄책감과 수치심에 맞서는 심리학/ 셰리 캠벨/ 제효영 옮김/ 심심/ 2만1000원

세상에는 온기를 머금은 단어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유독 가깝고 흔해서 자칫 잊고 살기 쉬운 단어를 고르라면 바로 ‘가족’일 듯싶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속마음을 온전히 내보이기가 구차하게 느껴지듯, 가장 익숙하고도 낯선, 가장 사랑스럽기에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고, 서로 걱정하면서도 더욱 냉정해질 수 있는, 그래서 가장 가깝고도 먼 이름이 가족이다.

가족은 그 형성 과정이 신비하고도 자연스럽지만 서로에게 굴레가 되기도 한다. 나만의 인생이 아닌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삶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만큼 서운하기도 해 상처 주기 등을 반복한다.
가족이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관계다. 저자 셰리 캠벨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학대에서 벗어나 ‘나를 지키는 관계’를 위해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끝내 헤어질 결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공감과 용기, 위로를 건넨다.
누구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2015년 미국의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0% 이상이 일생 중 어느 시기에 가족과 관계가 소원해진 적이 있다고 답했다(35쪽). 또한 가정은 보이지 않는 학대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아동학대의 81.3%는 가정에서 발생한다(2022년 아동학대 연차보고서). 이처럼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거나 신체적·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이들이 많지만, ‘화목한 가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래도 가족인데 참고 넘어가라’, ‘네가 예민해서 그렇다’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많다.
셰리 캠벨/ 제효영 옮김/ 심심/ 2만1000원
책은 해로운 가족 때문에 관계 단절을 고민하는 사람부터 단절 후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몰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까지, 가족의 학대로부터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가 아픈 마음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저자는 가족과 단절한 심리학자로, 어린 시절부터 가족에게 끊임없이 신체적·정서적 학대를 당했다. 그는 가족의 괴롭힘을 견디며 살아오다, 40대가 되어서야 완전히 관계를 끊고 자신을 우선시하는 삶을 찾았다.

그는 해로운 가족에게서 벗어나는 법을 3부로 나눠 설명한다. 1부에서는 해로운 가족이 지닌 특성, 이들과 단절해야 하는 이유, 자신의 결정을 스스로 지지하기 위한 방법들을 안내한다. 2부에서는 가족의 학대가 발달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설명하면서,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한다. 3부에서는 관계 단절 후 가족의 보복과 2차 가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해롭지 않은 다른 가족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등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실용적인 조언을 들려준다.

해로운 가족에게서 벗어난 이들이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로운 가족의 조종과 심리적 지배에 오래도록 짓눌려 자기 긍정감이 낮고,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영아기 때부터 성장 과정 내내 해로운 가족의 학대가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노출되어 “자신이 얼마나 나쁜 아이이기에 나를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라는 자기 회의감에 빠진다. 이들은 ‘나는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다’라는 근원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118쪽). 저자는 이런 상처를 극복하려면 마음 깊은 곳 트라우마를 들여다보고, “그들이 주입한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121쪽). 생애 발달 단계와 단계별로 생존자가 겪은 애착 문제, 생존자의 뇌에 남은 트라우마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생존자가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받아 자신을 불신하게 되는지를 밝힌다.

해로운 가족은 단절 이후에도 제3자를 이용해 접근하거나, 사회적 상황을 빌미로 괴롭힘을 시도하며 생존자의 인생에 계속해서 끼어든다. 생존자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2차 가해는 “생존자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가족과의 불화에 끼어들고, 생존자가 끔찍한 인간이라는 해로운 가족의 주장에 물들어 그 가족과 함께 생존자를 비난하는 형태로도 발생”할 수 있다. 비난의 화살을 생존자에게 돌리려는 가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무심코 학대에 동참하는 것이다(286쪽). 2차 가해의 형태로는 선물과 카드 보내기, 경제적으로 위협하기, 질병과 사망 소식을 이용해 접근하기 등이 있다.

이외에도 해로운 가족은 자세한 사정을 굳이 알 필요 없는 남이나 생존자와 친밀한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하거나(312쪽), 생존자에 대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험담을 늘어놓거나(317쪽), 연휴와 가족 행사를 통해 접근하는 등(319쪽) 다양한 방법으로 생존자의 삶을 위협한다. 또한 관계를 끊은 가족과 생존자 사이에 낀, 생존자에게 직접 해를 가하지 않는 다른 가족을 대해야 할 일도 생긴다.
저자는 그럴 때일수록 생존자가 스스로 정한 경계선을 더욱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대에게 어떤 사정이 있어도 ‘이것만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고 명확하게 기준을 정해 놓으면, 생존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해로운 가족에게 이용당하는 제3자까지 모두 지킬 수 있다.

종종 생존자는 자신의 사정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처한 상황을 지나치게 세세히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렇게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으며 그냥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답하면 된다고 조언한다. 해롭지 않은 가족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단절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이는 타협할 수 없는 경계선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332쪽).

저자는 “해로운 가족에게 당한 것을 되갚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찾고 멋지게 잘 살아가는 것”(347쪽)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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