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하의 본초여담] 동의보감 초판본 글씨체는 허준이 아닌 OOO의 서체다

정명진 2024. 5. 11.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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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는 현재 <동의보감> 초판본 중하나인 '오대산사고본'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은 <동의보감> 초판본의 서문으로 이 글씨체는 바로 내의원자 목활자로 찍어낸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년)이 발발하자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로 피난했다. 당시 태의(太醫)였던 허준은 피난길에 함께 올라 왕을 보살폈다. 다행히 선조는 다시 건강한 상태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는 허준을 지극히 신임했다.

선조는 애민정신이 강해서 항상 백성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래서 새로운 의서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의서도 들어와 있었고 조선에서 출간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있었지만, 이 의서들만으로 조선 백성들의 병을 쉽게 치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을 불러 하교를 하였다.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현존하는 잡다한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도록 하라. 또한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한글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인 정작, 태의인 양예수와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함께 관청을 설치해서 의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양예수는 허준보다 선배 어의였고, 정작은 민간 의사로 어의는 아니었지만 도교적 양생술과 함께 의학에 도통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이명원은 침술에 뛰어났으며, 김응탁과 정예남은 신참 어의였다.

허준은 가장 먼저 목차를 잡았다. 맨 앞에는 오장육부와 함께 각 기관이 그려진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라는 해부도를 넣고자 했다. 그 이유는 질병뿐만이 아니라 몸을 치료하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는 의안(醫案)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나서 정(精), 기(氣), 신(神), 혈(血)을 중심으로 해서 내과에 해당하는 내경편(內景篇), 근골격계와 외과에 해당하는 외형편(外形篇), 다양한 병증들을 다룬 잡병편(雜病篇), 본초를 분류하고 설명한 탕액편(湯液篇), 침구와 경락을 설명한 침구편(針灸篇) 순으로 편집하고자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막바지에 일본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바로 정유재란(1597~1598년)이다. 의서 편찬에 참여한 어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허준은 어쩔 수 없이 의서의 편찬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고작 목차만 정해졌을 뿐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의서를 편찬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리고선 궁에 소장하고 있는 의서 500권은 내주고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는데 참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의서 편찬 작업이 절반 정도 이루어졌을 때 선조는 승하하고 말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허준은 선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주로 유배가 되었다. 선조가 죽자 어의였던 허준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광해군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치료해 준 것 때문에 광해군 또한 허준을 신임했다. 그래서 허준은 유배 중에도 의서를 집필할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 바로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났다. 허준은 선왕의 유지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서 의서를 집필했다.

1610년(광해군 3년), 허준은 드디어 새로운 의서를 완성했다. 집필을 시작해서 1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방대한 양이었다.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광해군에게 진상했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읽어보고는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太僕馬)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노라. 그리고 서둘러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그러자 내의원 제조가 아뢰기를 “동의보감은 이미 한 부를 필사해서 완성해 놓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책 수가 25권, 25책으로 많고 다른 의서와 달리 작은 두 줄로 소주(小註)가 달려 글자를 새기기 무척 어려워서 지방 인쇄소에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습니다. 따라서 궁에 별로도 국을 설치해서 활자로 인쇄하고 의관들이 감수하고 교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궁에 보관 중이던 금속활자를 왜놈들에게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송구하게도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를 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를 윤허했다.

감수와 교정의 책임을 맡은 감교관(監校官)으로는 통훈대부 내의원 직장(直長)인 이희헌과 통훈대부 내의원 부봉사(副奉事)인 윤지미가 맡았다.

제조가 목판인쇄가 아니라 목활자로 인쇄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목판인쇄는 책의 한 장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을 판 하나에 새겨서 인쇄하는 방식으로 손상되거나 오자가 생기면 판을 통째로 한꺼번에 모두 바꿔야 했지만, 목활자는 한 개의 한자를 양각으로 도장처럼 새겨서 한 글자씩 끼워 넣어서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누락된 한자나 손상된 한자만을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용이했다. 사실 전란을 겪으면서 목판인쇄로 사용할 만한 나무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결국 내의원자(內醫院字) 목활자로 인쇄하기로 했다. 내의원자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을해자란 1455년(세조 1년, 을해년)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당대의 명필가로 알려진 강희안(姜希顏)의 글씨를 본떠서 만든 구리활자를 말한다.

내의원자는 을해자를 바탕으로 목각(木刻)한 것으로 선조가 승하한 해부터 광해군 7년까지 내의원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목활자로 주로 의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훈련도감에서 출판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에도 목활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의보감은 내의원에서 직접 만든 내의원자 목활자를 이용해서 편찬, 인행, 교정까지 시행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음력 11월 어느 날, 동의보감 초판본이 세상에 나왔다. 동의보감이 완성된 지 3년 만이었다. 허준은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후 2년 만에 향년 77세에 별세했다.

이후 동의보감은 전남관찰영, 호남관찰영, 영남관찰영 등의 지방 인쇄소에서 추가로 인쇄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명성은 이웃나라에도 퍼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쇄되었다. 인쇄소마다 새롭게 목판을 만들거나 제각기 만든 활자로 인쇄를 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동의보감은 판본마다 한자의 모양도 다르고 오탈자 등이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통 동의보감을 허준이 지었기 때문에 동의보감의 글씨체를 허준이 직접 쓴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동의보감 초판본의 글씨체는 허준의 글씨가 아니라, 명필가 강희안(姜希顏)의 서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허준의 필체는 없다.

* 제목의 ○○○은 ‘강희안(姜希顏)’입니다. 항간에 동의보감 초판본이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나 훈련도감 목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설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동의보감 서문> 東醫寶鑑序. ○ 我宣宗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庸, 不足觀爾, 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無醫藥, 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産, 而人不能知爾. 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 太醫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値丁酉之亂, 諸醫星散, 事遂寢. 厥後, 先王又敎許浚, 獨爲撰成, 仍出內藏方書五百卷以資考據. 撰未半而龍馭賓天. 至聖上卽位之三年庚戌, 浚始卒業而投進, 目之曰東醫寶鑑, 書凡二十五卷. (동의보감 서문. ○ 우리 선종대왕은 몸을 다스리는 법도를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확장시켜 의학에 마음을 두시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셨습니다. 병신년에 태의 허준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라.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허준이 물러나와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관청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여 대략 중요한 골격을 이루었는데, 정유재란을 만나 여러 의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선종대왕이 다시 허준에게 하교하여 홀로 책을 편찬하게 하시고 대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 오백권을 내어주어 고증하게 하셨는데 편찬 작업이 반도 끝나기 전에 선종대왕이 승하하셨습니다. 성상이 즉위한 지 삼년이 된 경술년에 허준이 비로소 작업을 마치고 진상하면서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모두 25권입니다.)
○ 上覽而嘉之, 下敎曰, 陽平君許浚, 曾在先祖, 特承撰集醫方之命, 積年覃思, 至於竄謫流離之中, 不廢其功, 今乃編帙以進. 仍念先王命撰之書, 告成於寡昧嗣服之後, 予不勝悲感. 其賜浚太僕馬一匹, 以酬其勞, 速令內醫院設廳鋟梓, 廣布中外. 且命提調臣廷龜撰序文 弁之卷首. (성상께서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시기를,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종대왕 때에 의서를 지으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어 여러 해를 고심하여 귀양을 가서 떠돌아다닐 때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제 책을 편찬하여 진상하였다.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고, 서둘러 내의원으로 하여금 관청을 설치하고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조 신 이정구에게 명하여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싣게 하셨습니다.)
○ 萬曆三十九年辛亥孟夏, 崇祿大夫, 行吏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筳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臣李延龜奉敎謹序. (만력 39년 신해년 1611년 초여름에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이정구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서문을 짓습니다.)
○ 萬曆四十一年十一月日, 內醫院奉敎刊行. 監校官 通訓大夫, 行內醫院直長臣李希憲. 通訓大夫, 行內醫院副奉事臣尹知微. (만력 41년 1613년 11월 어느 날, 내의원이 하교를 받들어 간행하다. 감교관 통훈대부 행내의원직장 이희헌, 통훈대부 행내의원부봉사 윤지미)
<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1610년 11월 21일. 內醫院官員以提調意, 啓曰: “以東醫寶鑑分送下三道, 使之刊刻事, 曾已啓下, 移文各道, 日月已久. 而卷秩甚多, 功役不貲, 故各處頉報及狀啓, 前後非一, 然猶申飭各道, 整備材料, 歲後卽爲分刊矣. 因念此書, 與他冊有異, 小註分行, 字數細密, 刊刻甚難. 藥名病方, 小有差誤, 則關係性命, 旣無本冊, 只以寫出一件飜刻, 更無憑准之路. 今若付之外方, 則非但玩愒稽遲, 完畢無期, 抑恐舛錯訛謬, 終爲無用一本. 臣等爲是之慮, 更爲商量, 則自本院, 別爲設局, 以活字印出, 醫官監校, 如頃日醫書印出時例, 則事必易就, 而又無訛誤之慮矣. 후략.” 傳曰: “依啓.” (내의원에서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을 하삼도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 책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이 감수하고 교열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후략.”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논문> ○ 하정용. 내의원자본(內醫院字本) 연구의 제문제(諸問題) - 동의보감(東醫寶鑑) 연구를 위한 선행과제. 의사학(醫史學) 제17권 제1호(통권 제32호) 17ː23­36 June 2008
: 서지학계에서 소위 내의원자본이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의 금속활자인 을해자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여기서 을해자란 1455(세조 1, 을해)에 강희안(姜希顔, 1424-1483)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를 말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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