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성사진’ 속 여자가 왕비요, 마고자 차림 남자가 대원군이라는데…[박종인 기자의 ‘흔적’]

박종인 선임기자 2024. 5. 11.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그 사진들의 진실

고종비 민씨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녀를 명성황후라고 부르면 민족적이라고 하고 민비라고 부르면 친일적이라고 한다. 왕비 민씨는 존경을 받기고 했고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 왕십리 하급 군인들은 “한 사람만 골라 처치하고 나머지 민씨들을 다 죽인다(區處一人盡殺諸閔·구처일인 진살제민)”고 선언했다.(박주대, ‘나암수록(羅巖隨錄)’ 3책, 162. 선혜청 분요) 이 ‘한 사람(一人)’이 왕비 민씨다.

열강들을 이용해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왕비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암살됐다. 지금 그녀는 반일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뮤지컬 ‘명성황후’(1995)에서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임오군란 군인들이 저런 말을 한 장소는 흥선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이다. 대원군은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며 자기 집에 유폐된 상태였다. 대원군을 만난 군인들이 이렇게 덧붙인다. “대감은 전혀 걱정마소서. 새 세상을 만들어 대감과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大監勿慮勿慮 作新世上然後 與大監共太平).” 대원군은 이들을 격려했고, 군인들은 궁궐과 한성에 사는 민씨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사진②> 국사 교과서에 실렸다가 빠진 왕비 민씨 사진.

사진의 진실을 찾아서

자, 이제 사진 이야기다. 몇년 전까지 위 <사진②>가 왕비 민씨 사진이라며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비녀를 꽂은 형식과 복식이 왕실 여성이 맞다는 고증이 나오면서 이 사진은 한 동안 왕비 민씨 사진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왕비일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이 사진은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그런데 아직도 시중에는 이 사진이 ‘명성황후 사진’이라며 유통되는 중이다. 한번 사실이라고 굳어지면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또 한 동안 <사진⑤>가 왕비 민씨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같은 주장은 격렬한 학계 논쟁 끝에 왕비가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종적을 감췄다. 하지만 일반대중 상당수는 여전히 이들 사진을 ‘명성황후 사진’으로 받아들인다.

첫번째 사진, 합성사진이 왕비 사진?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꼬레아 꼬레아니’(1904)라는 책이 있다. 번역본도 나와 있다. 이 번역본 272페이지에 <사진③>이 실려 있다. 사진 설명은 ‘궁중 복색을 갖춘 궁궐여인’이다.

<사진③> '꼬레아 꼬레아니'에 실려 있는 '궁녀 사진'.

그런데 277페이지에는 ‘기생의 의복 한 벌’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①>이 실려 있다. 이 <사진①><사진②>을 합성하면 왕비 민씨 사진이라는 <사진③>이 나온다.

<사진①> '꼬레아 꼬레아니' 실린 '기생의 의복 한 벌' 사진

<사진③> 속 돗자리 앞쪽에 있는 발이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다. 배경은 오른쪽 커튼, 왼쪽 색동 장옷, 뒤쪽 책가도 배치는 <사진①>과 동일하다. ‘명성황후 사진인데 일본인들이 화려한 배경을 지워 상궁처럼 보이게 했다’고 주장하며 이 사진을 일본인의 대표적인 왜곡사례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억지다.

1900년 조선정부가 대표단을 파견한 파리만국박람회에 주한프랑스공사관이 ‘서울의 기념품(Souvenir de Seoul)’이라는 소책자를 출품했다. 여기에 배경이 없는 <사진②>가 실려 있다. 제목은 ‘궁궐의 여자(Dame du Palais)’다. 모델이 왕비라면 고종이 ‘궁궐의 여자(궁녀)’라는 설명을 허용했을 리가 없다.

1900년 파리박람회 책자에 실린 '궁녀' 사진.

이 배경 없는 사진이 ‘조선의 왕비’ 혹은 ‘궁녀’라는 엇갈린 설명과 함께 서구 매체에 실려나갔다. 조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는 시점에 조선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상업적으로 유통되던 사진’을 기사 맥락에 맞게 삽입한 것이다.

두번째 사진, ‘시스루’가 왕비?

이후 <사진⑤>가 젊을 적 명성황후 사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마고자를 입은 흥선대원군 사진’<사진④>과 배경이 동일하니까 대원군과 왕비 민씨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다는 주장이다.

<사진⑤> 미국 스미스소니언 보고서에 실린 궁녀 사진.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사진④> 왕비 민씨(추정) 사진과 배경이 동일한 대원군 사진. /미 하버드대박물관

1882년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왕비를 죽이고 대원군과 태평을 누리겠다”고 주장했다. 군란 이후 대원군은 궁궐로 들어가 왕비 민씨를 죽었다고 공식 발표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다 두 달이 채 못돼 충청도 장호원에 숨어 있던 왕비가 환궁했고 대원군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청나라로 납치됐다. 이후 대원군과 왕비 민씨는 사사건건 정적으로 대립했다. 그런 두 사람이 동일 공간에서 동시에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여자 사진은 치마가 ‘시스루’다. 치마 안 속바지가 들여다보인다. 당시 왕실 사진은 외교 수단으로 사용되곤 했다. 100% 성복(盛服) 차림으로 촬영했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복장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비 민씨 사진이라고 유통되고 있는 사진은 모두 일반인을 모델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현존하는 왕비 민씨 사진은 ‘없다’가 정답이다.

촬영자는 스미스소니언 학자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과 ‘시스루를 입은 여자’ 촬영자는 피에르 루이 조이(Pierre Louis Jouy)라는 미국인이다. 임오군란 1년 뒤인 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와 함께 조선에 왔다. 조이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속 조류학자다. 조선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표본 수집을 위해 입국했다.(Peter Juhl, ‘조선에 온 최초의 스미스소니언, 피에르 루이 조이의 생과 작업(The Life and Work of Pierre Louis Jouy, The Smithsonian’s First Man in Korea)’, 왕립아시아학회한국지부 학회지 95집, 2021)

1891년도 스미스소니언 연례보고서에 조이의 연구 성과가 실려 있다. 429페이지에서 488페이지까지 그가 촬영했거나 수집한 사진, 수집한 기물 사진과 설명이 삽입돼 있다. 434페이지와 435페이지 사이에 인물사진들이 실려 있다. 여기에 위 <사진⑤>가 실려 있다. ‘도판10(Plate X)’ 번호가 붙은 이 사진 설명은 이렇다. ‘조선의 궁녀(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 여름 복장. 머리는 궁중 여성 특유의 장식이 있다. 웃옷은 언제나 흰색이고 치마는 파란색이다. 오직 왕족만 붉은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리고 사진 출처는 ‘피에르 루이 조이 촬영(From a photograph by Jouy)’. 이 보고서에 실린 사진 가운데 여덟 장에 ‘조이 촬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 <사진⑤>와 청나라식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 사진<사진④>는 배경과 조명이 동일하다. 이 또한 촬영자가 조이라는 뜻이다. 이 대원군 사진은 미국 하버드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청나라’ 복식을 한 이 사진은 조선 민속학 보고서인 스미스소니언 보고서에는 빠져 있다.

대원군? 정체불명의 사내!

대원군은 1882년 8월 27일 청나라군에 의해 천진으로 납치됐다. 1885년 10월 5일 귀국한 대원군은 즉시 고종에 의해 운현궁에 유폐돼 외부인 접촉이 금지됐다. 조이는 1883년 5월 조선에 왔다. 그해 11월 부산으로 가서 세관에서 일하며 경상도지역 식물과 조류를 연구했다. 1886년 여름 원산으로 떠난 표본 채집 답사를 제외하고는 경상도를 떠난 적이 없다. 그해 11월 조이는 미국으로 귀국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대원군 중국 체류 시기와 조이의 활동 시기를 비교하면 조이와 대원군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따라서 대원군 촬영은 불가능했다. 1900년 한국학 연구조직인 ‘왕립아시아학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포크, 베르나두, 로웰처럼 조이와 동시대에 조선을 찾았던 사람들과 달리 조이는 94차례 발행된 이 학회 학회지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이상, Juhl, 앞 논문) 대원군처럼 ‘언급 가치가 높은 인물’을 조이가 만나고 촬영했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이 학회지에 기록돼 있어야 정상이다.

<사진⑥> 1882년 청나라에서 촬영한 대원군. /서울역사박물관

1882년 9월 청나라 천진에서 촬영한 대원군 사진<사진⑥>과 비교하면 명확하다. 대원군 유폐를 결정한 직후 청 정부가 기록 차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된 ‘진짜 대원군’ 사진이다. 두꺼운 아랫입술을 제외하면 눈매와 콧대, 귀 위치, 귀 생김새가 다 다르다. 1880년 여름 제작한 61세 기념 초상화<사진⑦>와 천진 사진은 이 요소들이 유사한 반면 마고자를 입은 남자와 초상화 속 대원군은 동일인물로 보기 어렵다.

<사진⑦> 대원군 61세 기념 초상화(1880년). /서울역사박물관

게다가 마고자를 입은 사내 사진은 일본 업체들이 사진엽서로 만들어 판매했는데 제목은 ‘대원군’이 아니라 ‘조선 풍속, 조선인 복장(CUSTOMS OF KOREAN)’이다.<사진⑧> 영어 단어 스펠이 틀린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모든 부정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조이가 마고자를 입은 대원군을 촬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정황을 보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사진⑧> 마고자를 입은 사내 사진으로 일본 업체가 제작한 사진 엽서. '조선 풍속, 조선인 복장'이라고 돼 있다. /이돈수 제공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