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하수도에 악어가 산다고? 현대인의 불안이 낳은 ‘도시 괴담’

채민기 기자 2024. 5.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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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설화 ‘도시 전설’ 270편 추적… 세부 내용 달라져도 핵심 안 변해

도시전설의 모든 것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박중서 옮김|위즈덤하우스|1016쪽|4만8000원

“전 세계에서 반복되는, 그리고 그 화자들에 따르면 증인을 통해 검증됐다는 이야기들을 모은 선집이 세상에는 하나쯤 있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남긴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서문에 이를 인용한 이 책이 바로 그런 선집에 해당한다. 미국의 민속학 연구자로 유타대 교수를 지낸 저자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도시 전설(urban legends) 270편을 채록하고 그 기원을 추적했다. 최초의 출처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이야기가 유행한 시점이나 연구자·방송에 제보한 인물,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문헌 등을 자세하게 밝혔다. 신화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보듯, 오늘날의 민간 설화인 도시 전설에 주목하며 거기에 빠져드는 현대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 전설, 이 시대의 신화

뉴욕 하수도에 악어가 산다는 이야기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 전설 중 하나다. 영화 ‘앨리게이터’(1980)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 이야기는 또한 도시 전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토머스 핀천의 소설 ‘브이’(1963)와 뉴욕타임스 칼럼(1982)을 비롯해 하수도 악어를 언급한 1960~1980년대 문헌 네 종류를 소개한다. 악어의 색깔과 행동, 하수도의 환경 같은 세부에서 차이가 나지만 애완동물로 기르다 싫증 난 사람들이 변기에 흘려보내는 바람에 하수도에 악어가 살게 됐다는 줄거리는 같다. 도시 전설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며, 구전되는 과정에서 변형되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악어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초자연적 존재는 아니다. 이 지점에서 도시 전설은 유령이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와 구분된다. 불특정 다수 사이에서 널리 퍼진다는 점에서 UFO 목격담이나 엘비스 프레슬리 생존설(說)처럼 소수가 열광하는 이야기와도 다르다. 민간 전승 연구 기관에 악어 이야기를 제공한 학생이 “(친구) 조엘하고 래리한테 들었다”고 한 것처럼, 형식상 객관성을 띠지만 정작 출처를 검증할 수 없다는 점도 특징이다. ‘친구의 친구’가 출처로 특히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도시 전설이 “너무 훌륭해서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깔끔하고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인위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 ‘too good to be true’는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비친 현대인의 자화상

24개의 주제별로 분류된 도시 전설은 현대인을 비추는 거울이다. 예컨대 자기 집 앞을 지나던 레미콘 기사가 마당의 고급 승용차를 보고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 콘크리트를 부어 버렸는데, 사실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다는 이야기는 “충분한 증거 없이 결론으로 비약하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시험을 보던 MIT 학생이 창문을 열려고 다가가자 감독관이 “뛰어내리지 마!”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바닷가 휴가지에서 입양한 불쌍한 강아지가 알고 보니 아이티 쥐(중국 쥐 버전도 있다)였다는 이야기는 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암시한다. 월마트 직원의 노래에 지역 상인을 비웃는 가사가 있다든가, KFC가 다리 넷 달린 돌연변이 닭을 개발했다는 전설엔 대기업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이 나타난다. 크게 웃는다는 뜻의 인터넷 약어 ‘LOL’(laughing out loud)이 사실은 ‘우리 주님 루시퍼(Lucifer our Lord)’라는 의미의 사탄 숭배 기도라는 이야기는 민간 전승(folklore)이 사이버 전승(cyberlore)으로 변화하는 최근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도시 전설에는 성적 일탈에 대한 충동, 맹목적인 전통 숭배, 자기 합리화, 허풍 같은 인간의 민낯이 드러난다. “도시 전설은 우리 자아가 부분적으로만 합리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며, 우리는 자기 본성을 솔직한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목적으로 이 전설을 구연하는 것이다.”

많은 도시 전설이 오염, 질병, 신기술, 사고, 망신 등에 대한 불안감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역자는 “이런 공통적인 정서야말로 오늘날 사회 문제로 대두한 온갖 가짜 뉴스의 근간”이라고 지적한다. 불안한 인간은 쉽게 믿고 쉽게 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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