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킨스의 글을 빌려… 소년의 목소리로 차별과 가난에 맞섰다

황지윤 기자 2024. 5.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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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가 만난 사람] ‘2023 퓰리처상 소설가’ 바버라 킹솔버
/은행나무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장편소설|강동혁 옮김|은행나무|848쪽|2만5000원

850쪽에 달하는 소설이 출간됐다. 지난해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한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원제 Demon Copperhead). 이 ‘벽돌 책’을 다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잠시, 미국 소년의 재잘거림을 따라가다 보면 수십 장이 훅하니 지나있다. 반항적인 십 대 소년의 일인칭 서술은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떠올리게 하고, 소년의 궤적을 쫓으며 당대의 사회문제를 까발리는 능청스러움은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연상시킨다.

영국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쓴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의 줄거리를 따른 점이 특이하다. 등장인물도 이름과 특징을 약간만 바꿨지 거의 일치한다. 표절이 아니다. 일종의 ‘다시 쓰기’이자 오마주. 19세기 영국 런던이라는 무대를 20세기 말 미국 남동부 애팔래치아 지역의 농촌으로 옮겨 온 현대적 변용이다. 고전의 힘을 빌려 오늘날 독자들이 보다 생생하게 받아들일 이야기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저자는 디킨스를 ‘내 천재적인 친구’라고 부르며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책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울림을 준다.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한 소년의 지혜롭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가난, 중독, 제도적 실패, 도덕적 붕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들려준다”며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훌륭하게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생태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바버라 킹솔버(69)를 이메일로 만났다.

미국의 생태주의 소설가, 에세이스트 겸 시인인 바버라 킹솔버. 데뷔작 '콩나무들'(1987)이 평단의 갈채를 받으며 미 전역 고등학교와 대학교 문학 교재로 쓰였다. 앞서 소설 '포이즌우드 바이블'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고 장편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로 지난해 퓰리처상과 여성소설상을 받았다. /Evan Kafka

–소설을 다시 쓰는 독특한 방식을 썼다.

“이런 문학적 장치를 생각해 내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았지만, 방법을 찾아 헤맸다. 제도적 실패에서 비롯된 가난, 전염병처럼 퍼진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남용 등은 다루기 어려운 주제다. 독자가 보기 싫은 세계일 수 있다. 그런 세계로 어떻게 독자를 초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왜 하필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인가.

“런던 근교 해안가 마을 브로드스테어에 있는 찰스 디킨스가 한때 살았던 집이 조식을 주는 숙박업소(Bed&Breakfast)로 운영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작가가 방문을 마다할 수 있을까? 바다가 보이는 절벽에 우뚝 서 있는 맨션에는 11월이라 그런지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세상이었다. 심지어 디킨스의 서재에, 그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쓴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거기 앉아 파도치는 바다를 몇 시간 동안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도 이 풍경을 보면서 지역에 뿌리박힌 가난과 버려진 것 같은 아이들에 대해 썼지….’ 디킨스가 살았던 시대도 이를 외면하고자 했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직면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애가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해”라고 말이다.”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그날 밤, 그 자리에서 곧장 시작했다. 디킨스가 내 옆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웃으면 그가 웃고, 내가 울면 그가 울었다. 그의 소설을 오늘날 미 버지니아로 옮겨 왔다. 기숙학교는 위탁 아동을 공짜로 부리며 착취하는 담배 농장으로 바꾸는 식이었다. 물론 디킨스의 소설을 읽어야만 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비교해도 흥미로울 것이다. 소설을 완성하는 데까지는 3년이 걸렸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자전적 소설로 알려졌다. 당신의 소설에도 자전적 요소가 있나.

“애팔래치아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만 자전적이다. 애팔래치아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다. 내가 훤히 아는 이 세계의 복잡함, 아름다움, 애환 등을 묘사하고자 애썼다.”

–애팔래치아 지역을 배경으로 하층민의 삶과 가난에 주목했다.

“‘하층민’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이다. 그들이 충분히 돈을 벌지 못하거나 실직자일 수는 있겠다. 애팔래치아 사람들은 세대를 걸쳐 내려오는 차별, 트라우마나 절망 또는 마약 중독과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의도적으로 그들의 삶에 주목하려 한 적은 없다. 내가 사는 지금, 여기에 대한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지난해 여름 질 바이든 여사가 휴가지에서 이 책을 읽는 모습이 사진에 찍히기도 했다. 독자가 당신의 소설에서 무엇을 보길 바라나.

“그들이 전혀 모르던 세계를 향한 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설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인정받는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시당하거나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을 테니까. 이 소설이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하게 태어나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초대장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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