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광석·양모 팔던 호주, 로봇·우주항공 두각 딥테크 강국 탈바꿈

허정연 2024. 5. 11.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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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4.5차 산업혁명 승부수
호주 AMSL항공이 개발에 성공한 수직이착륙 항공기 ‘베르티아’.
호주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전이 있다. 서호주 조폐국 ‘퍼스 민트’에 있는 순금 1t짜리 금화다. 2011년 주조된 동전 앞면에는 캥거루가, 뒷면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새겨졌다. 지난달 21일 찾은 퍼스 민트에서는 골드러시가 이어졌던 1800년대 후반의 모습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지금도 서호주 지역은 세계 4대 금 생산지로 꼽힌다.

금만이 아니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리튬을 비롯해 철광석·천연가스 등 온갖 천연자원과 광물이 흘러넘친다. 지난해 이 같은 광물과 석탄·석유 등 원료의 수출은 호주 전체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말 그대로 ‘땅만 파도 자원이 나오는’ 천혜의 환경을 갖춘 셈이다.

리튬, 전 세계 생산량 53%나 차지

지난해 호주의 총 수출액은 전년보다 12.4%나 감소했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세계 원자재 수요가 둔화한 데다 다른 나라들이 생산량을 늘리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원자재 가격이 하락한 탓이다. 하지만 호주 현지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와 기업인들은 “예상 가능한 결과”라며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중지를 모은 끝에 21세기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광석과 양모를 팔던 나라에서 첨단 미래산업과 딥테크 강국으로의 변신’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이를 위한 전략 마련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자원 부국’에서 ‘기술 부국’으로 탈바꿈하는 데 범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특히 호주 내에서도 자원이 풍부한 서호주정부가 가장 적극적이다. 호주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서호주는 세계 최대의 리튬 생산지다. 지난해 호주 전체 수출의 약 45%도 서호주의 몫이었다. 시몬 스펜서 서호주정부 국제전략정책관은 “2019년까지만 해도 광업 분야 비중이 가장 컸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금융업과 제조업 등으로의 다변화를 적극 꾀하고 있다”며 “서호주의 지리적 특성상 다양한 자원을 아시아로 실어나르는 조선·항만산업이 발달했는데 이를 미래 신산업과 최대한 연계하는 방안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서호주정부에서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 조언을 책임지고 있는 피터 클린켄 수석과학자는 “호주는 전 세계 리튬 생산량의 53%를 차지할 정도로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만 그동안엔 채굴 후 곧바로 중국 등으로 수출하는 ‘파서 나르는(Dig and Ship)’ 방식에 그쳤다”며 “하지만 원자재는 가격 변동에 취약한 만큼 최근엔 정제·가공 기술과 자동화 기술을 적극 도입해 수익성과 안정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나쉬대 연구원이 대학 혁신랩에서 개발한 스마트 로봇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리적 특성상 자동화와 로봇 기술 산업이 발달한 점도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클린켄 수석과학자는 “서호주는 면적은 넓지만 인구는 290만 명에 불과하다 보니 광산에서 2000㎞ 떨어진 퍼스의 사무실에서 원격으로 채굴·생산하는 등 일찍부터 자동화 제조 공법을 발전시켜 왔다”며 “현재 원격 제어 기술을 심해에서도 활용하고 있는데 앞으론 항공우주 분야에도 적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2018년 창업한 신생 기업인 키로닉스(Chironix)가 대표적 사례다. 퍼스에 기반을 두고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무인 로봇과 차량을 개발 중인 이 회사는 최근 원격 제어 기능을 광물·석유 채취에서 국방·우주 분야로 넓혔다. 더 나아가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에도 참가해 300만 달러(약 41억원) 규모의 계약도 맺었다. 다니엘 밀포드 대표는 “전쟁터를 오가는 일종의 ‘우버’를 만드는 이 군사 프로젝트에 우리 기술을 적용할 경우 전장에서 군수품을 나르고 부상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훨씬 원활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드니공과대학 테크랩이 전파 차단 연구를 위해 설치한 무반향실.
더욱이 호주는 페니실린 개발과 엑스레이(X-ray) 기술 등으로 과학·의학 분야에서만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기초과학의 숨은 강국’으로 꼽힌다. 와이파이와 초음파 장비, 전자심박조율기, 비행기용 블랙박스 등도 호주산 발명품이다. 상위 10% 과학논문 인용 횟수도 세계 4위를 기록할 정도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호주가 과학 강국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연구 성과 대비 저조한 상용화 실적 탓이었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따르면 지난해 호주 과학 연구의 상업화 수준(14위)은 한국(3위)보다도 크게 낮다. 이에 호주 정부도 1차 산업 중심 국가에서 4.5차 산업혁명 국가로의 변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간극을 줄이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고 나섰다.

“최소 5~10년 내다보고 장기 투자”

천연자원 개발용 원격 제어 로봇이 서호주 우드사이드 로봇 연구소에서 시연되고 있다. 허정연 기자, [사진 AMSL항공]
그 중심엔 호주 연방 과학산업연구기구(CSIRO)가 있다. 호주 최대 종합연구기관으로 최근 기초연구의 상업화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기술은 있지만 자본이 부족한 벤처기업을 집중 지원한다. 여기서 나온 연구 성과를 국가 산업과도 적극 연계하며 이미 102억 호주 달러(약 9조14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해냈다. 불에 타지 않는 경량 소재, 배터리 관리 시스템, 티타늄 3D 프린팅으로 만든 갈비뼈와 마우스피스 등이 이곳의 지원으로 탄생했다.

CSIRO 멜버른 사무실에서 만난 폴 세비지 제조 부문 부대표는 “35년 전 이곳에서 처음 일할 때만 해도 양모 산업이 국가 핵심 산업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관심은 로봇·AI·항공우주·바이오 등 딥테크 기술에 온통 쏠려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뉴사우스웨일스주에 기반을 둔 AMSL항공도 주정부 등의 투자 지원 속에서 단기간에 성장한 회사다. 2018년 엔지니어 2명이 창업한 지 6년 만에 수소 연 료를 동력으로 한 수직이착륙(VTOL) 항공기 ‘베르티아’를 최초로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맥스 요크 AMSL항공 CEO는 “별도의 활주로 없이 이착륙이 가능해 긴급 의료 수송 등에 적합한 게 장점”이라며 “현재 개발 중인 무인항공기는 향후 국방 분야에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산학 협력과 연계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정부·산업체·대학이 공동으로 13억 호주 달러(약 1조1600억원)를 투자해 호주의 주요 대학을 대상으로 기초과학 연구와 상업화를 지원 중이다. 우주·국방·첨단제조·식량·청정에너지 등 전략 분야가 주된 연구 지원 대상이다. 모나쉬대학 혁신랩과 시드니공과대학(UTS) 테크랩 등 대학들도 자체적으로 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기업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있다. 혁신랩에서 활동 중인 모나쉬대 2학년생 제임스 그레이는 “우주항공 기술을 기반으로 친구들과 HPR이란 벤처기업을 창업했는데 학교뿐 아니라 관련 기업의 투자도 받게 돼 초기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대학은 특히 벤처기업들이 빠지기 쉬운 ‘죽음의 계곡’을 슬기롭게 넘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지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아이반 추아 UTS 매니저는 “대학에서 아무리 훌륭한 연구를 진행해도 상용화하기까진 시간과 비용이 만만찮게 소요되다 보니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적잖았다”며 “이 고비를 잘 넘도록 지원하는 건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세비지 CSIRO 부대표도 “최소한 5~10년을 내다보고 장기적으로 투자한 뒤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딥테크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다릴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호주 워클리재단이 공동 주최한 ‘2024년 한·호주 언론 교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시드니·멜버른·퍼스(호주)=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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