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 중심 군산정 하나로 묶어, 강력한 물의 요새 구축

2024. 5. 1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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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⑤
秋光暮(수국추광모)
물나라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警寒雁陳高(경한안진고)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憂心轉輾夜(우심전전야)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새벽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통영시 동호항방파제 인근에 위치한 이순신공원. 멀리 한산도가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한산도야음’이란 시를 쓰기도 했다. [사진 윤동한]
# 한산도 이순신은 수국(水國), 즉 물나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순신의 간절한 마음은 그가 직접 지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란 시를 통해 구구절절 드러나 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백성의 안위에 대한 근심에 잠 못 이루는 밤, 한산도 통제영의 수루에 올라 새벽까지 지새며 지은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한산도를 수국이라 불렀다. 한산도는 지금은 경남 통영시 한산면이다. 이순신은 약 4년에 걸친 한산도 통제영 시절에 여러 곳의 공공건물을 세웠다. 활을 쏘는 사정(射亭·한산정으로 추측)과 동헌, 루, 누방, 헌방, 대청, 청방, 군기고, 서청, 창고, 우물, 활터 등을 지었다. 이순신은 통제사 지휘본부인 운주당에서 휘하 장졸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하고 소통하며 수하 장수와 병사들을 한 몸으로 묶어 냈다.

경제·산업을 이해한 유일무이한 무장

한산도 시절 이순신은 정경달 등 종사관을 임명해 각종 군무를 보좌토록 했고 특히 둔전 관리를 집중적으로 돕도록 했다. 그에게는 전투보다 군량미 조달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군인도 먹어야 산다. 당시 조정으로부터는 아무런 지원도 없었다. 전선 건조와 군량미 확보에서부터 훈련과 징병, 모병까지 모든 것을 장수와 군졸들이 자력으로 해결해 내야 했다.

그는 이렇게 구축한 한산도를 본거지로 삼아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승리하면서 해상권을 장악했다.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서해 진출 의도를 좌절시켰다. 일본 수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한산도대첩은 행주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승리를 견인했던 이순신은 모함을 당해 한성 의금부로 끌려가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상황에 처한다. 1597년 4월 정탁 등의 간절한 구명 운동으로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는 사이 원균이 이끌게 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망해갔다.

이에 선조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고 1597년 8월 3일 재임용 교지를 전했다. 비록 통제사로 재임명은 받았지만 이순신에겐 병력도 없고 무기도 없었다. 거처할 수군기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임명 교지를 받은 8월 3일부터 전라도 고을을 돌며 수습을 시작했다. 8월 4일 곡성을 시작으로 5일 옥과, 8일 순천과 낙안, 9일 보성, 18일 회령포로 이동해 수군재건에 힘쓰는 한편 24일에는 어란포, 28일에는 장도, 29일에는 벽파진으로 이진하며 다가올 일본 수군의 침략을 대비했다.

그리고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해 일본 수군을 유인하고 16일 명량에서 기적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13척대 133척의 싸움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일궈낸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이순신은 남서해안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임시 통제영 기지를 찾아야 했다. 10월 9일 전라우수영을 거쳐 10월 11일 발음도로 진을 옮겼다가 10월 29일 보화도(고하도)로 옮겨 월동하면서 수군 재건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국경영의 본을 보여준 탁월한 리더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로 이진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순천왜성의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사진은 광양만을 따라 쌓은 순천왜성. [사진 윤동한]
# 고하도 1597년(선조 30년) 10월 29일 목포 보화도(오늘날 고하도)로 통제영을 옮긴 이순신은 이곳에서 경제 개념을 적극 활용해 통제영과 백성이 공존하는 시대를 열었다. 당시 수군 재건에 꼭 필요한 군사와 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순신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피난민을 군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먼저 피난민을 정착시키고 안전하게 보호한 후에 그들 일부를 군사로 활용키로 했다. 2000명의 군사를 먹이고 입히며 의병들을 모으고, 흩어진 산졸을 데려와 강병으로 길러냈다. 이후 명나라 수군 참전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고하도는 너무 좁았다. 이에 보다 넓고 병참 보급이 용이하며 순천 왜성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인 고금도로 이진을 결정했다.

# 고금도 통제영은 군사 8000명 수준으로 커졌다. 군사들이 궁핍할 것을 염려한 이순신은 해로통행첩을 만들고, 3도(경상·전라·충청)의 연해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 중 통행첩이 없으면 간첩선으로 간주하고 통행할 수 없도록 했다. 배를 타는 사람은 모두 통행첩을 받았다. 이순신은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서 쌀을 내고 통행첩을 받게 했다.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으로 정했다. 이때 피란하는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왔기 때문에 쌀을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통행을 금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했다. 이렇게 10여 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섬을 얻었다. 이를 통해 이순신은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왜군 첩자를 막을 수 있었고, 피난민의 입장에서는 수군으로부터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게 됐다.

고금도 시절은 비록 일 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로운 수국(水國)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섬은 한산도보다 2.8배나 크고 해로통행첩과 둔전에서 거둬들이는 군량미가 막대한 물량이 되었다. 이는 군선을 건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백성들이 몰려들면서 생업에 걱정이 없어지자 물류와 경제가 살아났다. 이로써 삼도수군통제영이 하삼도의 실질적인 경제 유통의 중심지가 된 셈이었고 해상왕국의 기지가 됐다.

통제영이 있었던 서남해 지역
그의 자주자립 경제 관념은 해변 고을을 두루 수군 전속으로 만들고 지휘 아래 두었으며 해변에 버려진 광범위한 땅을 개간해 둔전(屯田)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백성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먹고 입을 것을 새로 만들어 내고, 수군에 물자를 내면서도 백성들 자신에게도 득이 되는 사업이었다. 이런 식으로 바다와 육지의 산물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막대한 전비(戰費)를 충당했다. 이런 경제력은 통제영의 군대를 튼튼하게 받쳐주는 주춧돌이 됐다.

2018년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를 펴낸 장한식은 “이순신이 한산도를 중심으로 서·남해 여러 섬과 해변에 이룩한 ‘군산정(軍産政) 복합체야말로 하나의 나라(國)에 비견할 만했다’고 봤다. 이른바 ‘물의 나라’의 출범이었다. 이순신이 고금도에 통제영을 옮겨 정착한 이후 피난민이 약 1500가구나 거주할 정도로 농사지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 같은 해(1598년) 7월부터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도착하면서 고금도에는 조선 수군을 포함해 2만7000여 명이 주둔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금도는 명실상부한 통제영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한산도, 고하도, 고금도에서 확보한 전력을 기반으로 절이도해전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때 임시로 설치된 통제영이 전란 후에도 대일(對日) 방어 차원에서 제도화됐고, 경남 앞바다에서 유영(留營) 체제로 정착되어 1895년까지 조선의 해상 방어를 담당했다.

이순신의 수국경영의 실체는 통제영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의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통제영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 수군의 주체이며, 후일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중요한 방패 역할을 해냈다. 이후 300년간 이어지는 통제영 역사에서 208대에 이르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나왔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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