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연줄 비서관·행정관 ‘용산’ 밖으로 내보내야 [강천석 칼럼]
대통령 일하는 곳·사는 곳은 九重宮闕 아닌 투명한 유리 어항
대통령 기자회견을 보고 과거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였다. 답변하는 태도나 사용한 단어가 다듬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어쩌면 기대를 너무 낮게 잡은 데서 비롯된 착시(錯視)효과인지도 모른다. ‘좋은 방향으로 변했다’는 내 느낌은 심증(心證)뿐이었다.
몇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 ‘회견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100점 만점으로 하면 몇 점을 주겠는지’ ‘그런 점수를 매긴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응답자 10명 가운데 극단적 점수를 준 여당 의원과 야당 의원은 제외했다. 한쪽은 80점 다른 한쪽은 30점을 줬다. 여당 의원도 ‘야당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 대담한 제안은 없었다’는 단서를 달았다.
나머지 응답자 8명의 연령은 40대에서 80대까지 고른 분포였다. 남성이 여성보다 많았다. 직장을 찾는 20대 청년, 첫 아이를 낳아 키우는 30대 주부, 동네 마트 주인 같은 영세 자영업자와는 선이 닿지 않았다. 수공업(手工業) 방식 간이(簡易) 여론조사의 한계다.
회견 느낌은 전원이 ‘나아졌다’고 했다. 달라진 정도가 ‘조금’이라는 것도 공통됐다. ‘훈계조(訓戒調)가 줄어서’ ‘부인 문제를 늦게나마 사과한 게 뭉개버린 것보다는 낫다’ ‘전(前) 정권 탓이 사라진 듯해서’ ‘이런 회견을 두어 달에 한 번이라도 했더라면…’이라는 소감(所感)을 달았다. ‘대통령의 동문서답(東問西答), 영수회담 비선(秘線) 의혹 등을 ‘추가 질문’ ’보충 질문’을 통해 따졌더라면 당장은 난처해도 결과적으론 대통령에게 득(得)이 될 텐데…'라며 기자 탓도 했다.
응답자들 6명은 60점, 2명은 70점을 줬다. 평균 62.5점이다. 답안지대로 채점한 게 아니라 대통령이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점수를 줬을 수도 있다. 야당은 낙제점을 줬다. 야당 입장을 수용하거나 구미를 돋울 제안이 없었으니 그럴 만하다.
협치(協治) 자세를 보일 소재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연금 개혁 법안이 그렇다. 여야는 현재 9%인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그런데 ‘얼마를 받느냐’는 소득대체율을 두고 ‘여당 43%’ ‘야당 45%’라는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대통령이 ‘야당 안을 받겠다’ 혹은 ‘서로 1%씩 물러서 44%로 하자’는 새 제안으로 물꼬를 텄더라면 협치의 첫 시범이 됐을지 모른다.
대통령은 ‘부인 특검’과 ‘해병대원 특검’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응답자 일부는 해병대원 특검은 공수처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겠지만 특검을 해야 하는 쪽으로 굴러갈 수도 있다고 봤다. 부인 특검에는 관심도 작고 ‘전(前) 정권 때부터 팔 만큼 팠다’는 대통령 설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검찰이 디올백 수사를 가혹할 정도로 엄정하게 한다면 부인 특검에 대한 여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어느 분의 마지막 말에 뼈가 있었다. 이번 기자회견은 ‘대통령이 부인 문제로 국민에게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라고 했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할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사과는 ‘잘못 인정’ ‘반성’ ‘재발(再發) 방지 제도 도입’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번 대통령 사과는 첫째 요건(要件), 넓게 보면 둘째 요건도 포함된 발언이다. 그러나 핵심인 재발 방지 제도 개선이 빠졌다. 특별감찰관 임명은 이번에도 거론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일하는 곳, 사는 곳을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부르던 것은 옛일이다. 용산 시대 대통령 환경은 안에선 밖을 내다보지 못해도 밖에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어항이다. 비서실에 대통령 부인 연(緣)줄로 들어온 비서관·행정관이 꽤 된다고 한다. 그 명단이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입 밖에 내지 않아서 그렇지 공인(公認)된 비밀이라고 한다.
이 상황인데 회의에서 ‘부인 문제’를 누가 꺼낼 수 있겠는가. 논의도 못 하는데 대통령에게 보고할 용기를 누가 내겠는가. 설혹 한 번 용기를 냈더라도 대통령이 이마를 찌푸리는데 다시 보고할 바보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보고도 받지 못한 대통령이 어떻게 그 상세한 내용을 알겠는가.
‘부인 문제로 다시 사과할 기회는 대통령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무서운 말이다. 대통령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좋은 변화를 뒷받침할 물증(物證)을 원한다. 부인과 선(線)을 대고 있는 비서관·행정관을 내보내는 건 중요한 물증이자 대통령실 정상화를 향한 큰 걸음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