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 4년 새 19% 뚝…시들해진 일본 취업 열기

2024. 5. 1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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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시장도 ‘수퍼 엔저’ 파장
“돈을 모아도 모으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일본의 한 정보기술(IT) 기업에 취업해 현지 근무 중인 정모(42)씨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던 정씨는 2019년 경력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평소 일본어를 독학할 만큼 일본에 관심이 많았던 정씨는 몇 달간 일본 취업을 준비했고,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그리고 전보다 10%가량 오른 연봉에 현지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간 만족스럽게 살았던 정씨는 지난해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가파르게 떨어진 엔화 가치 때문이다.

정씨는 “환율이 예전처럼 (100엔당) 1000원대만 돼도 괜찮을 텐데 이젠 800원대라 (번 돈을) 한국의 은행 계좌로도 못 옮기고 있다”며 “연봉이 오르는 폭보다 환율이 떨어지는 폭이 더 크니 일본에서 일할수록 실제 소득은 감소하는 암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씨처럼 일본에 취업한 한국인 대부분은 엔화로 급여를 받더라도 결국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를 고려해 번 돈을 원화로 계산한다. 한국에 부양가족을 둔 경우가 많은 데다, 취업비자의 재류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과 결혼해 정착하지 않는 한 영주권 취득도 까다롭다.

일본, 구직자 100명이면 일자리는 131개

일본 취업 열기가 ‘수퍼 엔저(엔화 가치 하락)’ 여파로 시들하다. 기존 일본 취업자의 고민이 깊을 뿐 아니라, 신규 일본 취업을 고려하던 구직자 사이에서도 냉담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최근 온라인의 일본 취업 관련 커뮤니티엔 “연봉 실수령액에 이점이 없어 일본행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글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 회사는 가뜩이나 연봉이 짠데 환율까지 고려하면 남는 게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평생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생각이면 가능하다”거나 “동남아도 구인난이 심각한데 (일본보다) 동남아에서 일하는 게 낫다”는 냉소적 반응마저 나온다.

그간 전반적인 취업난이 이어졌던 한국과 달리 일본에선 구인난이 심화했다.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불황을 뒤로하고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선 반면, 급속한 고령화·저출산으로 근로자 수는 부족해져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내 유효구인배율(구직자 대비 일자리 비율)은 2018년 1.61배, 2019년 1.6배로 1973년(1.76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도 1.31배였다. 구직자가 100명이라면 일자리는 131개로 일자리가 구직자보다 30% 넘게 더 많다는 의미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국내 취업의 문을 계속 두드리느니, 일본 취업이 낫다고 보고 일본 취업에 도전하는 구직자가 증가한 배경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하지만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일본 취업자(연수 및 알선취업 포함) 수는 2019년 2469명에서 2022년 1154명, 지난해 1293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같은 기간 일본 내 유효구인배율은 1배보다 높게 유지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웠던 2021년(586명)은 예외로 보더라도 일본 취업 열기가 그만큼 시들해졌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엔저 지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한 헤드헌팅 업체 관계자는 “일본 경제 상황이 좋고 일본 내 일자리도 여전히 넉넉하지만 엔저가 심화하면서 (국내에서) 일본 취업 문의가 급격히 줄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연평균 원·엔 환율은 2020년 100엔당 1105.07원을 기록한 이후 하락세가 가파르다. 2021년 1041.45원, 2022년 983.44원, 지난해 931.24원까지 내려왔다. 올해 1~4월 평균치는 892.86원이다. 일본에서 400만 엔의 연봉을 제시받는 회사원이라면 2020년엔 4420만원을 벌었지만, 환율이 하락한 지 4년째인 올해 1~4월 평균치로 환산하면 4년 전보다 19.2% 감소한 3571만원을 버는 데 그친다는 얘기다. 더구나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만성화한 일본에선 전년 대비 연봉 인상률이 3%를 넘는 기업이 드물다. 지난해 일본 기업 전체의 평균 초봉 인상률이 2.84%였는데 이조차 30년 만에 2% 이상 오른 것이다.

달러당 엔화 가치, 34년 만에 최저 수준

결국 일본에서 취업하면 연봉이 올라도 엔저 때문에 실제로는 소득이 매년 줄고 있는 구조라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일본 취업 열기도 당분간 식은 채로 유지될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는 “일본이 미국과 달리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면서 크게 벌어진 미·일 간의 기준금리 격차가 좁혀지기 전까진 엔저가 지속될 것”이라며 “원·엔 환율도 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달러당 엔화 가치는 지난달 말 장중 한때 1990년 이후 34년 만에 최저 수준인 160엔이 깨졌고, 이달 현재도 150엔대 중반을 기록 중이다.

전 세계 환율을 좌우하는 미국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좀처럼 안 잡히면서 연 5.25~5% 기준금리를 유지 중이다. 그사이 디플레이션과 싸운 일본은 올해 3월에야 17년 만의 금리 인상을 단행(연 -0.1%→0%),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났다.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은 경제가 살아나면서 특히 IT 등 성장 업종에서 해외 우수 인력을 적극 채용 중이라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를 꿈꾸던 국내 청년들한테는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라면서도 “엔저로 인한 실제 소득 변동 가능성 등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구직 활동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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