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적 재능과 일신의 안위, 조국 광복에 바친 헤이그 밀사
━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④ 보재(溥齋) 이상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언이다.
선생은 1870년(고종 7년) 충북 진천에서 선비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경성 장동(현 명동)에 사는 동부승지였던 인척 이용우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후일 일가 6형제가 전 재산을 팔고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회영·이시영과 이웃해 살면서 한문과 신학문, 영어·불어·러시아어 등을 함께 공부하게 된다. 이시영은 “총명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득달하였다”라고 회고했다. 20대에 율곡을 계승할 학자로 평가받았고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고 전했다. 수리·과학까지 섭렵한 선생은 1898년 수학책 『수리』를 쓰고 이어 최초의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를 저술해 근대수학을 개척했다.
을사늑약 체결되자 종로에서 자결 시도
을사늑약으로 선생의 인생행로가 크게 바뀌게 되는데, 1906년 망명을 결심하고 이동녕과 함께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으로 간다. 북간도와 서간도는 19세기말 이후 흉작 등으로 이주해 온 한인과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많이 살았고 용정은 북간도의 중심이었다. 선생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으로 ‘서전서숙’을 세웠는데 독립운동을 위한 최초의 신교육학교다. 선생은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직접 교단에서 역사·지리·수학·법률 등을 가르치고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에 섰다. 이 학교는 1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지만 후일 신흥강습소, 명동학교 등 많은 항일 민족학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선생과 이위종은 헤이그를 떠나 구주와 미주에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구국외교를 전개한다. 일제는 밀사사건 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 즉위 후 1908년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은 사형,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후 선생은 고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게 된다. 미주본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09년 하와이로 건너가 미주한인단체를 통합해 ‘국민회’를 결성하고 국민회 결의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다.
연해주는 한인동포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립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정부도 우호적이어서 1차 세계대전 전 해외독립운동의 중요거점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위해 국민회의 지원으로 유학자 이승희 등과 함께 북만주지역의 봉밀산 일대 황무지를 매입해 ‘한흥동 마을’ 건설에 나섰다. 이 마을은 동포의 생활터전과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했으나 마적의 행패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10년 접어들면서 국내 의병이 거의 진압되고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도 실패에 이르자 선생은 의병장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의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또한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퇴위한 고종에게 군자금지원과 연해주파천을 상소하지만 러시아가 일제와의 관계 속에서 망명을 좌절시키고 13도의군 활동도 중지시켰다.
국치 직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고 “우리는 차라리 2천만의 두려(豆?)를 끊을지언정 5천년 래 조국, 이는 버릴 수 없다”고 취지문을 남긴다. 성명회는 연일 집회를 열어 병탄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선생이 기초하고 8624명이 서명한 선언서를 각국 정부에 보냈다. 선생은 이 일로 체포되어 유배당했지만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돌아와 최재형·이동휘 등과 함께 여러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간 통합과 연대를 위해 ‘권업회’를 창설하고 실질적 운영기관인 의사부 의장에 선임된다. 권업회는 독립운동기관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하게 활동했고 1912년 권업신문을 창간, 신채호가 주필을 맡아 언론을 통한 투쟁을 이어갔다. 1913년 선생이 권업신문의 사장 겸 주필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낙망 말고 분발” 남기고 47세에 순국
이렇게 러일동맹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상하이로 가서 박은식 등과 함께 1915년 ‘신한혁명당’을 조직한다. 선생이 본부장에, 박은식이 감독에 선임된 신한혁명당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제정체제인 중국·독일과의 연합과 고종 망명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국제정세 변화와 관련인사 체포로 무산된다.
망명 후 10년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선생은 연이은 독립투쟁이 무산되고 오랜 망명생활로 몸마저 쇠약해져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다. 건강이 크게 악화된 선생은 1916년 우스리스크로 옮겨와 투병하던 중 “우리나라에 국권회복의 기회가 올 것이니 모두들 낙망 말고 분발하라”는 유지를 남기고 1917년 47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동지들은 선생의 유언대로 시신과 유품을 화장하여 수이푼강(수분하, 라즈돌나야강)에 그 재를 뿌렸다.
이상설 선생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구국외교의 선봉장이자 항일운동, 민족교육, 망명정부수립, 독립전쟁추진 등 국권회복투쟁의 지도자였다. 후일 옥중의 안중근은 선생에 대해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발달을 도모하여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이라고 썼다.(안중근 평전-김삼웅)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이후 진천 생가가 복원되어 숭모비, 숭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은상이 쓴 비문은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와 우리의 위로 웃고 받으옵소서’라 마무리 하고 있다. 1996년 숭렬사 경내에 선생과 부인을 합장한 초혼묘가 마련되었고 2001년 수이푼강변에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세워졌다. 2024년 3월 진천에 기념관이 준공되어 7월 개관 예정이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