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외면하는 나쁜 정치[오늘을 생각한다]

2024. 5. 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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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지난 5월 2일,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통과됐다. 그로부터 1시간 30분 만에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브리핑을 열고 특검법 통과를 비난했다. 그는 특검법 통과를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고 규정했다. 여당 원내대표도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회가 대통령 앞으로 법안을 넘기기도 전에 정부 여당이 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로 한 셈이다.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하는 주된 논거는 이렇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경찰이 사건을 수사 중인 상황인데 정상적인 사법절차를 무시하고 특검을 도입하는 건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입법 폭거라는 것이다.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언론 인터뷰에서 채 상병 특검법을 수용하는 것이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남겼다.

특검은 원래부터 정상적 사법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위공직자가 수사 대상일 때 도입하라고 만든 제도다. 그래서 특별검사의 자격 요건도 까다롭다. 사안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1년 이내에 당적이 있었거나 공직에 있었던 사람은 배제한다. 공정한 수사를 위해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죽음을 막고, 삶을 이어가는 일이다. 막지 못한 죽음은 곱씹어 반성하고 책임져야 한다. 죽음을 외면하는 정치가 나쁜 정치다.


8년 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도 국회는 검찰이 특별수사본부를 꾸려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특검을 도입했다. 수사 대상이 행정부 수반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검찰의 대면 조사에 불응했고,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했다. 민정수석실을 통해 검찰 수사 상황을 염탐하려 한 정황이 드러난 적도 있다. 이 당시 특검의 수사팀장은 지금의 대통령인 윤석열 검사였다. 특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지 모를 리 없고, 특검과 검경의 수사가 병립한 전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채 상병 사망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9개월 전에 발생했다. 그러나 아직 경찰 수사조차 끝이 나질 않았다. 참사를 촉발한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가려내는 데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위공직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위법부당하게 수사에 개입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유일한 사람은 초동수사를 맡았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다. 정상적 사법절차에 따라 수사를 받던 사람들에 대한 수사는 사실상 중단 상태고, 수사를 지휘했던 사람이 재판을 받는다. 이미 정상적 사법절차가 파산한 지 오래다. 대통령이 연루된 수사 외압 의혹을 규명하지 못하면 공명정대한 사망 사건 수사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8년 전 특검 수사팀장 윤석열이 그랬듯, 대통령을 성역 없이 수사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게 특검이다.

정치는 죽음을 막고, 삶을 이어가는 일이다. 막지 못한 죽음은 곱씹어 반성하고 책임져야 한다. 죽음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추모뿐이라면 정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외면하는 정치가 나쁜 정치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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