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자의 사부곡’ 뮤지컬에 롯데家 불참 이유는
[비즈니스 포커스]
롯데그룹을 창업한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일대기를 조명한 뮤지컬 ‘더 리더’가 최근 막을 내렸다. 이번 공연은 신 명예회장의 장녀이자 신동빈 회장의 이복 누나인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 측이 마련했다. 신 명예회장 별세 이후 고인의 업적과 철학을 기리는 행사는 그동안 여러 번 있었지만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동빈 회장과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전무)은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신 의장 측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신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은 불참했지만 ‘더 리더 공연을 축하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축하 화환을 보냈다.
신영자가 본 父 신격호…뮤지컬 ‘더 리더’
재계에서는 신 회장이 이번 행사를 신영자 의장이 마련한 개인적 행사로 보고 참석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뮤지컬 공연은 지난 5월 3~5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5차례 펼쳐졌다. 제목은 ‘더 리더(The Reader)’로 ‘책을 읽는 사람(The Reader)’과 ‘경영자(The Leader)’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신 명예회장이 평소 즐겨 읽던 문학 작품을 모티프로 구성됐다.
신 명예회장은 만 20세이던 1942년 단돈 83엔을 들고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에서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으로 돌아와 재계 6위 롯데그룹을 일궜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이 신 명예회장과 맏딸 신영자 의장을 모델로 삼았다. 책을 가까이했던 ‘남자(신 명예회장)’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랐던 ‘여자(신 의장)’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복동생 신동빈·신동주 이야기 없어
뮤지컬에는 신 의장의 이복동생인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 의장 측 관점에서 바라본 ‘신영자의 사부곡’인 셈이다. 뮤지컬을 후원한 롯데재단은 신 명예회장의 장손녀이자 신 의장의 장녀 장혜선 이사장이 이끌고 있다.
롯데가 3세인 장 이사장은 신 의장이 202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이후 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모든 사업명에 ‘롯데 신격호’를 붙여 눈길을 끌었다.
장 이사장은 공연 첫날인 5월 3일 기자간담회에서도 할아버지와의 각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공연 내용의 90%가 할아버지(신격호)의 일대기와 비슷하다”며 “언제나 책을 읽고 계셨고 저희에게 직접 해주셨던 말들이 많이 반영됐다”고 밝혔다. 이어 “할아버지는 엄마(신영자 의장)와 가깝게 지내며 신뢰와 도전정신을 항상 강조했다”며 “이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신 의장 자녀들의 그룹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움직임이라는 시선도 존재한다. 신 의장의 1남 3녀 중 장녀 장혜선 롯데재단 이사장과 차녀 장선윤 롯데호텔 전무만 그룹에 재직하고 있다.
장 이사장은 모친의 역할을 이어받아 사회공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장 전무는 지난해 12월 롯데호텔 미주브랜드부문장으로 선임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신 의장은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배제됐으나 자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창업자와 가장 가까웠던 자식이자 조강지처로부터 얻은 유일한 자식이라는 상징성을 부각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신 회장의 입장에서 장남 신유열 전무가 경영 보폭을 확대하는 상황과 맞물려 이복 누나 자녀들의 부각이 불편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추모식도 흉상 건립도 ‘따로따로’
신 명예회장의 자녀는 2남 2녀다. 첫째 부인인 노순화 여사와 사이에서 장녀 신영자 의장을 낳았다. 이후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했다. 노 여사와 사별한 후 1952년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와 재혼해 신동주·신동빈 형제를 낳았다. 1972년 초대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 씨와 사실혼 관계를 맺고 신유미 전 롯데호텔 고문을 낳았다.
신 회장을 비롯해 롯데그룹 2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친을 기리고 있다.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은 2017년 자신의 입장에서 부친의 삶을 조명한 평전 ‘나의 아버지 신격호’를 출간했다. 책에서 그는 동생 신 회장을 ‘일본인 경영진의 대리인’으로 표현하며 경영권 재탈환을 “저의 숙명이자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신동빈 회장이 이끄는 롯데그룹은 신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에 맞춰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를 펴냈다. 신 회장은 회고록 헌정사를 직접 쓴 만큼 그룹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창업자에 대한 기록이다. 신 명예회장의 출생, 결혼, 유학생활부터 롯데의 탄생과 사업 확장 일화 등이 소개돼 있지만 신 의장 등 가족 이야기 비중은 많지 않다.
롯데그룹과 롯데재단은 신 명예회장 추모 사업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추모식도 따로 진행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 1월 신 명예회장의 기일(1월 19일)을 하루 앞두고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4주기 추모식에 장남 신유열 전무와 함께 참석했다.
롯데재단은 올해 2월 울산의 신 명예회장 선영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이 추모식에는 신 의장과 장 이사장을 비롯한 전 롯데 계열사 대표이사와 임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흉상 건립도 따로였다. 롯데그룹은 2021년 11월 신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롯데월드타워 1층에 흉상을 설치하고 5층에 680㎡(약 206평) 규모로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조성했다. 이후 매년 롯데월드타워 1층 흉상 앞에서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신 의장 측은 올해 4월 서울 마포구 망원동 ‘신격호 롯데장학관’ 1층 로비에 신 명예회장의 흉상을 건립했다. 이날 흉상 제막식에 신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 의장은 2021년 롯데월드타워 흉상 제막식·기념관 개관식에 신 회장과 함께 참석했으나 이후부터는 공식 행사에 함께 참석하지 않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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