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만한 느림보 동물은 왜 100m 땅굴을 팠을까[멸종열전]
백악기 후기 몽골에는 매우 희한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공룡이 살고 있었다. ‘낫 도마뱀’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테리지노사우루스가 그것이다. 몸길이 10m, 체중 3~5t으로 추정되는 테리지노사우루스는 티라노사우루스보다도 훨씬 키가 큰 공룡이었다. 낫 도마뱀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1m까지 길게 자라는 앞발톱 때문이다. 육식공룡에서 출발하였지만 초식공룡으로 진화한 테리지노사우루스는 발톱을 낫처럼 사용하여 풀을 베어 먹었다. 커다란 덩치와 낫처럼 생긴 기다란 발톱 덕분에 초식공룡으로 살 수 있었다.
몸길이 10분의 1쯤 되는 거대한 발톱이 있는 거대한 동물이 또 있었다. 200만년 전에 등장하여 1만년 전에 멸종한 메가테리움(Megatherium)이 바로 그것. 그리스어로 거대한(mega) 짐승(therium)이라는 뜻이다. 몸길이 6m, 몸무게는 4t에 이르렀으며 뒷다리를 들고 서면 키가 현대 코끼리만큼 컸으니 이름값을 하는 셈이다. 인간과 같은 시대를 산 메가테리움 역시 기다란 발톱이 특징인 거대 초식동물이다. 거대한 앞발톱은 최대 50㎝까지 자란다. 신체 비율을 따지면 테리지노사우루스만큼이나 긴 발톱이 있는 셈이다.
드넓은 열대우림의 울창하고 푸르른 숲을 감싸고 있던 촉촉한 안개가 서서히 걷힌다. 높은 캐노피가 거대한 무게의 발걸음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다. 두꺼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이 덥수룩한 털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털 그림자가 물웅덩이를 찾아 나무를 벗어난 다음에야 그 크기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 거대한 동물 메가테리움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커다란 짐승이 다 그렇듯이 메가테리움은 초식성이었다. 메가테리움은 테리지노사우루스처럼 긴 발톱을 낫처럼 사용하지는 않았다. 메가테리움은 거대한 발톱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먹이를 찾았다. 큰 몸집과 특수한 치열 덕분에 크고 작은 나무의 잎을 효율적으로 뜯어내고 강력한 턱으로 단단한 초목을 쉽게 부술 수 있었다.
메가테리움의 똥 화석에서 곤충과 도마뱀의 흔적이 나오지만 사냥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신체 구조가 사냥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체를 먹거나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를 힘으로 빼앗았을 것이다. 메가테리움은 일반적으로 현대의 친척처럼 네 발로 움직였지만, 이족보행 자세를 취해 뒷다리로 똑바로 서서 높은 나뭇가지에 닿거나 주변을 탐색할 수 있었다. 단순히 나뭇잎을 뜯어먹느라고 기다란 발톱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거대한 몸집만으로도 초식동물로 여유있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기다란 발톱은 어디에 썼을까?
굴 파는 동물 메가테리움
테리지노사우루스와 메가테리움은 거대하고 기다란 발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테리지노사우루스는 파충류이고 메가테리움은 포유류라는 것. 포유류인 메가테리움은 체온 유지를 위해 더 많이 먹어야 하고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야 했다.
메가테리움은 크기와 힘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며 주변 환경을 탐색하면서 에너지를 아꼈다. 느린 걸음걸이는 초식동물의 여유롭고 목가적인 생활방식에 적합해서가 아니었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 없이 먹이를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다행히 메가테리움은 커다란 몸집 덕분에 육식동물이 함부로 공격할 대상은 아니었다.
메가테리움은 앞다리로 땅을 파거나 어떤 물체를 다루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당시의 다른 초식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재다능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력한 발톱으로 땅을 깊숙이 파서 땅속에 크고 긴 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5년 브라질 지질조사국 연구원 아밀카 아다미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맞닿아 있는 히우그란지두술주에서 고대 생물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굴을 방문했다.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반적인 동물 활동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특이했다. 사람이 설 수 있을 정도로 큰 터널들은 지질학적 과정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현생 굴파기 동물보다 훨씬 큰 동물이 파낸 것으로 추정되는 특징이 드러났다.
굴의 높이와 너비는 2m에 달했으며 길이는 보통 20~30m 정도였는데 최대 100m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것도 있다. 굴의 단면이 특이하게도 덤벨 모양인데 입구는 넓고 높으며 안으로 갈수록 좁아진다. 굴 바닥은 미끄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이것은 굴을 만든 동물이 반복적으로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굴의 벽에는 발톱으로 파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메가테리움의 발톱 크기와 긁힌 자국의 크기 그리고 패턴이 일치했다. 결정적으로 메가테리움의 화석이 일부 발견되었다.
아밀카 아다미의 보고 이후 고생물학자들은 굴을 파낸 주인공은 메가테리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굴의 형성 시기와 크기 그리고 발톱 흔적이 그 근거였다. 그렇다면 메가테리움 같은 거대 포유류가 왜 힘들여서 이런 굴을 파야 했을까?
1만년 전 사라진 초대형 초식동물
강한 발톱으로 굴 뚫는 ‘굴착의 명수’
나무늘보처럼 굼떠 포식되기 쉬워
적으로부터 피하려 땅굴 생활한 듯
새끼 양육·체온 조절에도 안성맞춤
메가테리움 굴의 발견은 고대 생물의 행동과 생태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메가테리움은 강력한 초식동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은신처와 보호를 위해 광범위한 지하 터널을 파는 숙련된 굴착 선수였던 것이다. 굴은 포식자와 극한의 날씨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했다. 굴 같은 환경은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휴식처를, 추운 시기에는 따뜻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체온 조절에 도움이 되었다. 굴은 또한 새끼를 키우는 데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가테리움의 굴이 밀집되어 있거나 여러 개의 굴이 가까운 거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거대 동물인 메가테리움이 완전히 고독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복잡한 사회구조를 시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공간 배치는 짝짓기, 새끼 양육 또는 특정한 계절에 공동생활을 하는 정도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암시한다. 굴의 존재는 메가테리움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움을 더해주었다. 메가테리움은 복잡한 환경과 행동에 대한 적응력이 있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왜 멸종했을까? 생명의 멸종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항상 기후변화다. 빙하기의 차갑고 건조한 기후는 대형 포유류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마도 메가테리움은 크기와 특이한 식습관으로 인해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력이 떨어지면서 선호하는 서식지가 사라지고 먹이를 찾지 못하게 되자 생존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늘보는?
메가테리움은 우리말로는 ‘거대땅늘보’라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메가테리움은 현생 나무늘보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모두 나무늘보목에 속한다. 조금 거리가 있는 친척으로는 아르마딜로와 개미핥기가 있다. 모두 아메리카 대륙 동물이다.
나무늘보는 해부학적으로 평범하지 않은 동물이다. 발톱이 두 개 아니면 세 개인 것도 특이하지만 목뼈 수가 이상하다. 모든 포유류의 목뼈는 일곱 개다. 생쥐나 기린이나 벨루가나 사람이나 모두 목뼈는 일곱 개다. 그런데 두발가락나무늘보는 목뼈가 여섯 개이고, 세발가락나무늘보는 목뼈가 아홉 개다.
현생 나무늘보는 거대한 생물이 아니라 6㎏이 넘지 않는 보통 크기의 포유류다.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한 결과다. 그런데 나무늘보의 영어 이름은 ‘sloth’. 이름이 ‘나태(懶怠)’인 셈이다. ‘게으를 나’와 ‘게으를 태’가 합쳐져서 붙은 이름이니 도대체 얼마나 게으르단 말인가. 북한말로는 아예 게으름뱅이다. 한국 이름이 가장 신사적이다.
실제로 나무늘보 털의 색깔은 회갈색인데 초록색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털에 이끼가 낀 것이다. 얼마나 느리고 게으르면 몸에 이끼가 끼겠는가? 나무늘보가 느린 데는 이유가 있다. 근육량이 극도로 적다. 근육량이 적으니 에너지 소모도 적다. 에너지 소모가 적으니 조금만 먹어도 된다. 하루에 나뭇잎 몇 장만 먹고산다. 며칠에 한 번씩 똥 누러 나무에서 내려오는 게 활동의 거의 전부다.
나무늘보는 느려터진 동물이라 사람의 사냥감이 되기에 제격이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는 ‘나무에 걸린 고기’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먹을 만한 살이 없는 데다 맛도 없어서 사람의 식탐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멸종위기종이다. 그들의 유일한 서식지이자 보호막인 밀림이 급속히 줄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900m밖에 이동하지 못하고 금세 탈진해서 잠에 빠지는 나무늘보는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밀림 파괴만큼이나 기후변화가 현생 나무늘보에게는 치명적이다. 나무늘보가 먹은 나뭇잎이 소화되려면 장내 박테리아들이 활발하게 활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체온유지가 필수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우기가 길어지면서 배 속에 먹이는 가득한데 소화는 되지 않아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배가 부른 채로 결국 죽게 된다.
혹시 나무늘보의 현 상황에서 옛 메가테리움의 멸종을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메가테리움도 빙하기 때 장내 박테리아의 태업으로 배가 부른 채 소화가 되지 않아서 죽지 않았을까? (모른다. 단지 짐작이다.)
여명의 첫 햇살이 아마존 열대우림의 울창한 캐노피를 부드럽게 비추면 나무늘보 한 마리가 하루를 시작한다. 여전히 졸린 듯한 표정이다.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나무늘보는 분주한 세상을 무시하는 듯 느리게 움직인다. 이끼가 낀 덥수룩한 털과 한결같은 만족스러운 표정은 정글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고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무늘보는 주변의 긴박함을 무시한 채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숲속을 누비고(!) 다닌다. 가끔 멈춰 서서 나뭇잎을 뜯어먹는 나무늘보의 느린 움직임은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보여준다. 자신만의 평온한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이 소박한 생명체 나무늘보에게는 역경에 맞선 생존과 멸종 사이의 미묘한 균형에 대한 오래되고 긴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현대의 나무늘보는 나무 꼭대기 보호구역에 집착하며 인간의 침입과 환경 파괴에 직면한 생명의 연약함을 가슴 아프게 일깨워준다. 그러나 나무늘보의 생존 문제는 나무늘보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울창한 숲에 서식하는 훨씬 더 큰 생명체, 즉 한때 거대한 존재로 이 땅을 누비던 메가테리움의 투쟁을 반영하고 있다. 거대한 메가테리움은 멸종했다. 이젠 겨우 7종 남은 나무늘보 차례인가?
■필자 이정모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고 있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하려면 지난 멸종 사건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연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지만, 박사는 아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저술과 강연,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과학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살아 보니, 진화> <달력과 권력> <공생 멸종 진화> 등을 썼다.
이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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