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덕에 최고의 행운 누린 팀 쿡이 삼성에 던진 메시지
"쿡은 그의 가장 큰 경쟁자(삼성전자) 덕분에 최고의 행운을 누렸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가 타계하고 팀 쿡이 애플의 대권을 쥔 뒤 10년간 애플 내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개한 '애프터 스티브 잡스'(이진원 옮김, 2024년 4월 더퀘스트)에 나온 삼성과 애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월스트리저널과 뉴욕타임스에서 5년간 애플을 담당한 트립 미클 기자가 200여명의 애플 전현직 임원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을 취재한 쓴 것이다.
팀 쿡 애플 CEO의 하나의 행운은 2016년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7의 발화'라고 밝혔지만 또 다른 한번의 행운은 구체적으로 이 책에 언급되지 않았다. 추정컨대 애플 MP3플레이어(MP3P)인 아이팟 나노 출시 때 삼성전자 반도체총괄(현 DS 부문)의 도움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행운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책에선 애플의 내부 권력투쟁 과정 외에도 최대 경쟁자인 삼성전자와의 갈등, 애플이 바라보는 삼성전자에 대한 인식 등을 소개하고 있다. 611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이 책 내용 중 삼성전자와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현장 취재 경험을 토대로 정리해봤다.
잡스의 진정한 혁신은 소니의 워크맨을 넘어서는 MP3P 아이팟에서 나왔다. 주크박스를 한손에 담은 소니의 '워크맨'은 '심플함'을 선호하는 스티브 잡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워크맨을 아이팟이라는 MP3P를 통해 넘어섰지만 부족한 점이 적지 않았다. HDD(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저장장치로 사용한 아이팟은 초기 선풍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작동이 되지 않았고, 바닥에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충격으로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이를 해결해준 것이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메모리다.
당시 낸드플래시의 새로운 수요를 찾던 삼성반도체총괄 황창규 사장은 HDD 탑재 MP3P와는 다른 낸드플래시 MP3P 프로토타입 제품을 만들어 애플에 보냈다.
지난해 기자가 만났던 황 전 사장의 말을 빌면 당시 존 루빈스타인 애플 아이팟 제조총괄 부사장에게 이를 보냈고 그가 잡스에게 이 제품을 보고했다고 한다. HDD MP3P의 내구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잡스의 고민을 한순간에 해결해준 묘수였다.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한 '아이팟 나노'의 시작이었다. 문제는 낸드플래시의 확보였다.
이 과정에서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애플과 삼성간의 딜이 이뤄졌고 이 때 COO(최고운영책임자)로 임명된 팀 쿡의 역할이 있었다. 애플은 낸드플래시를 탑재한 MP3P로 전세계를 장악하고 싶었다. 낸드플래시 확보를 위해 잡스는 팀 쿡 COO를 한국으로 급파했다. 애플은 장기공급을 위해 5억달러의 선급금을 삼성전자에 주는 대신 공급단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황 사장은 장기공급 계약을 맺는 대신 삼성의 MPU(Micro Processor Unit) 반도체를 아이팟나노에 탑재하고, 삼성의 모바일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향후 출시할 스마트폰에 납품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양사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 애플은 낸드플래시 확보를, 삼성 반도체 부문은 다양한 분야에서 반도체 수요처를 확보했다.
문제는 그 뒤에 벌어졌다. 애플이 거의 독점한 낸드플래시로 인해 삼성전자세트 부문의 MP3P 사업과 전세계 중견 중소 MP3P 사업은 위기에 봉착했다. 아이팟 나노로 애플이 급부상한 결과다. 팀 쿡이 COO로 임명된 이후 처음 진행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그가 최고의 경쟁자로부터 얻은 첫 행운이었다.
하지만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고 팀 쿡이 그 뒤를 이어 5년이 지났을 무렵 애플 내부에는 '마법사'의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잡스가 일궈놨던 애플 내 창조적 시스템이 팀 쿡이 만든 효율적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최고의 가치를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잡스와 달리 쿡은 협력업체들은 물론 회사 내부적으로도 경영효율화를 통한 수익창출에 힘을 쏟았다.
잡스 이후 팀 쿡의 최대 업적은 2014년 7억 6000만명의 가입자를 가진 차이나모바일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한 것이다. 자체 생산이 아닌 폭스콘에 위탁생산을 통한 수익률 제고와 함께 최대 고객인 중국을 잡으면서 애플은 날개를 달았다. 하지만 기술혁신이 사라진 아이폰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고객들이 실망할 쯤 삼성전자는 애플이 하지 못한 혁신적인 제품으로 압박했다.
2016년 8월 2일 고동진 당시 삼성전자 IM 무선사업부장(사장)이 뉴옥 해머스타인 볼룸에서 전세계 언론에 세계 최초의 홍채인식 스마트폰(갤럭시 노트7)을 내세워 그동안 독창성에서 밀렸던 아이폰에 위협을 가했다.
8월 19일 일반에 출시되자 순식간에 250만대가 팔렸다. 그 한달 후 아이폰7을 내놓을 계획이었던 애플은 특별한 혁신이 담기지 않은 아이폰7의 출하량 감소를 우려해 미리 생산량 감축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발매 5일 후부터 노트7 배터리 화재 보고가 시작됐고 며칠 후 신작발표를 준비하던 애플에도 비상이 걸렸다. 팀 쿡은 아이폰7에 탑재된 배터리에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사 제품에는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당시 삼성 내부는 초비상이었다. 그 해 9월 어느날 기자는 삼성전자 서초사옥 42층 미래전략실장실을 찾았다. 당시 최지성 삼성미래전략실장에게 노트7 발화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최 실장은 "배터리 제조과정에서 양극재와 음극재 사이에 있는 분리막에 틈이 생긴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전량 리콜할 계획임을 밝혔다. 1차 리콜을 통해 판매된 250만대를 전량 회수조치하는 초강수를 뒀다. 당시 추정 손실 규모가 7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던 상황이었다.
1차 리콜 이후 새 배터리를 탑재한 노트7에서도 발화가 일어나면서 삼성은 10월10일 갤럭시 노트7 생산을 전격 중단했다. 출시 두달만에 제품이 단종된 것이다. 삼성이 홍채인식 기술을 최초로 도입한 혁신으로 애플을 누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행운은 잡스 사망 이후 혁신부재로 전작(아이폰6)과 별 차이가 없이 이어폰 잭만 사라졌다는 혹평을 받은 아이폰7과, 달릴 때 귀에서 빠지는 무선이어폰 '에어팟'에 대한 조롱이 시작될 쯤 찾아왔다. 아이폰7 출시 몇달 전부터 아이폰 판매 전망에 대해 걱정했던 팀 쿡에게는 삼성의 불행이 큰 행운이었다. 혁신성 부재에도 불구하고 아이폰7은 애플이 내놓은 제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이 됐다.
이때 이를 지켜본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잘 알지 못하는 IT 기업에는 투자 않겠다"던 자신의 고집을 꺾고 애플에 투자했고, 이후 애플의 주가는 날개를 달았다.
문제는 쿡의 시대가 벌써 13년이 흘렀다는 점이다. 팀 쿡은 한국전쟁 당시 18개월간 한국에서 군수물자의 관리를 담당했던 자신의 부친의 피를 이어받아 디자인과 기술보다는 공급망 관리로 성과를 이어갔지만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였던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 마법사의 수제자라고 불렸던 애플 기술담당 수석 부사장인 밥 맨스필드, iOS의 아버지로 불린 모바일 SW담당 부사장 스콧 포스톨 , 애플의 곳간지기 피터 오펜하이머 CFO(최고재무책임자) 등이 팀 쿡 집권 이후 애플을 떠났다.
쿡의 경쟁자로 불렸던 이들이 모두 떠난 이후 애플에서 혁신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이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소비자들에게 애플이 내놓은 눈에 띄는 제품은 없다.
애플이 2015년 애플워치를 출시한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야심작인 공간컴퓨팅 기기 '비전프로'은 지난 2월 출시 이후 20만대 가량이 팔린 후 반품 러시를 이뤘다. 팔린만큼 반품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500만원에 가까운 고가의 제품을 오래 사용할 경우 어지러움증 등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명명된 미래 자율주행차 개발에 수조원의 개발비를 투입한 애플은 최근 개발을 중지했다. 이어 애플워치에 탑재할 마이크로 발광다이오드(LED) 기술 개발도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AI 기술 경쟁에도 뒤졌다. 삼성전자가 갤럭시S24에 온디바이스 AI를 탑재해 다시 한번 기술로 애플을 추월하려고 할 때도 애플에 큰 변화는 없었다. 곧 출시될 아이패드에 AI 기술을 탑재한다고 하지만 AI 분야에서 이미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에 한참 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잡스 사망 이후 예견됐던 일이다.
비밀주의 애플은 각 부서간에도 상호 비밀을 유지한 채 그 정보의 허브인 잡스가 모든 일을 조율했었다. 하지만 팀 쿡은 부서간 개입을 꺼렸다. 디자인팀 사무실에도 자주 들리지 않고 대신 각 부서장이 그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으나 부서간 경쟁만 있을 뿐 협력은 부재했다는 게 애플 내외부의 평가다.
애플의 지나친 자만심도 위기의 징조로 보인다. 애플와치의 용두를 생산하는 과정을 소개한 책 내용에서 OEM 업체와 애플 디자이너 사이 대화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애플 디자이너들은 컴퓨터 제어기계인 CNC 도구로 용두를 잘라내기를 원했는데, 제조업체에서 더 저렴한 레이저 절단 공정이 있다며 이를 권했다.
이에 대해 애플의 산업디자인팀의 리코 조켄도르퍼는 "애플은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고, 줄리안 회니그는 "그건 삼성이나 할 짓입니다"라고 했다. CNC의 정밀도가 레이저 절단 공정보다 훨씬 뛰어나 수백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는 레이저 기술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삼성을 깎아내린 것이다. 부품업체인 삼성의 도움 없이 혁신이 불가능했을 애플이 다른 기업을 대하는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업의 성장그래프는 인간을 닮아있다. 태어나서 성장기와 성숙기, 쇠퇴기를 거친다. 잡스가 애플의 성장기였고 팀 쿡이 성숙기였다며 이제는 그 다음 시기로 접어드는 과정이다. 애플이 14년간 모바일 왕권을 쥐었다가 쇠퇴한 노키아의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새로운 진화를 거듭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잡스 이후 애플의 지난 13년간은 삼성전자와 이재용 회장에게도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이 회장이 선대 이건희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2014년 5월 10일 갑자기 쓰러지면서 경영전면에 나선지도 10년이다. 초격차의 메모리 기술리드십 유지와 TSMC와 퀄컴과 같은 파운드리나 시스템LSI의 경쟁자들과의 패권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애플이 현재 겪고 있는 혁신정체라는 성장통은 팀 쿡이 삼성전자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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