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우리 대화할까?

한겨레 2024. 5. 1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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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말 거는 책이 있다.

방향 안내 없이, 문장의 파편에 독자를 세우는 글.

뒤라스의 입말을 동료가 받아적고, 다시 읽고 퇴고하며 만들어졌다.

컨디션 난조로 긴 호흡의 글보다 파편적인 글이 잘 읽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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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삶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l 민음사(2019)

엉망으로 말 거는 책이 있다. 방향 안내 없이, 문장의 파편에 독자를 세우는 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물질적 삶’은 작가가 73살이었던 1987년 출간한 책이다. 뒤라스의 입말을 동료가 받아적고, 다시 읽고 퇴고하며 만들어졌다. 작가는 ‘물질적 삶’은 대화로 만들어진 만큼 어떤 여백 속에서 당신과 나 사이를 떠다니고 있다고 서두에 알린다. 이 시기 뒤라스는 오랜 알코올의존증으로 아팠고 이미 많은 책을 출간한 상태였다. 그는 여전히 욕망하고 사랑하길 멈추지 않았으며, 사랑과 광기는 그의 삶과 작품의 뿌리였다.

2024년, 37살인 나는 작가처럼 사랑과 광기라는 키워드에 자석처럼 끌리는 어딘가 망가진 독자다. 컨디션 난조로 긴 호흡의 글보다 파편적인 글이 잘 읽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일관성 없는 목차에 호기심이 생겼고, 어떤 의미도 전달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모습에는 묘한 위안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기모순을 파고드는 작가의 집요함은 뭐람. 이 헐렁하고 집요한 수다쟁이를 그대로 읽을 수만은 없다.

“우리가 이상한 욕망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겨울 동안 광기가 이어졌다. 그런 뒤에는 조금 가라앉아서, 그냥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24쪽)

최근 이상한 욕망과 이별했어. 상대는 4년 전 헤어진 사람. 그는 주기적으로 안부와 사랑을 전했어. ‘너를 만나면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 난 앞으로도 널 사랑하며 살 거야.’ 사는 게 눅눅할 때마다 그의 문장은 나를 위로했어. 어느 날 정신이 맑아지더라. 그에겐 오랜 연인이 있지! 너 지금 연인과 독점관계를 약속한 상태지? 지금 나랑 바람피우고 싶은 거야? 버벅거리더라. 책임감 없는 건 알았지. 다신 연락하지 말라 했어. 같은 이유로 반복된 이별이었어. 이게 사랑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전기 콘센트가 깨진 것을 본 남자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가? ‘이런! 콘센트가 깨졌군.’ 그리고 그대로 지나간다. 청소기가 부러진 것도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67쪽)

이 단락을 읽은 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깨진 콘센트 이야기를 해줬어. “안 보인대!” 다들 웃으며 공감했어. 얼마 전 나는 동거인을 붙잡고 ‘망가진 전등, 기름진 주방 후드’의 존재를 알렸어. 전등이 이제 다섯 개나 나갔어. 주방 후드가 엄청 기름져. 동거인이 드디어 그것을 보았어.

“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글이 뭔지 모른다.”(44쪽)

얼마 전, 동료 작가가 물었어. 작가가 전문가라고 생각해? 우리는 두 시간 내내 전문가가 뭘까, 작가는 뭘까 이야기 나눴어. 글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하지? 장르에 따라 달라지나? 나도 동료도 결국 모른다고 답했어. 뒤라스는 그렇게 많은 글을 써왔으면서 글이 뭔지 모른다고 해. 모르면서도 결국 써내는 마음은 뭘까? 힘든데 이렇게 읽는 마음은 뭘까.

“피폐해진 얼굴 그대로, 나이도 직업도 그대로, 나의 난폭함과 광기도 그대로, 여행 가방을 들고 책으로 들어가야 했다.”(101쪽)

얼굴… 아, 이제 분량이 끝났어. 아직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데.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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