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쉼표 하나도 내 의지대로”… 여성 작가, 무대 위 주인공 되다
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브론테’(연출 조민영, 작·작사 성재현)는 남자들의 세상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소설가 브론테 자매 이야기. ‘제인 에어’를 쓴 샬럿,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를 쓴 앤까지, 가난하지만 심지 굳은 세 자매를 향해 동네 사람들은 “악마에 들린 괴짜들”이라고 수군댄다. 하지만 세 자매는 때론 싸우고 때론 서로에게 의지하며 꿈을 향해 나아간다. “결혼하고 애 낳고 병들어 죽으면 끝인 삶을 위해 신(神)이 우릴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브론테 자매에게 글쓰기는 삶의 이유이자 자기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통로다. “우리는 이미 작가야.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글을 쓰고 싶다면 절벽에서 스스로를 떠밀어야 해.” 영리하게 채운 무대와 조명, 단 세 명의 여배우가 빚어내는 폭발적인 노래의 힘이 돋보이는 단단한 뮤지컬이다.
◇'여성 서사’ 넘어 ‘여성 작가 서사’
영화와 드라마뿐 아니라 무대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인 연극과 뮤지컬들이 주목받은 지 오래다. 이제 ‘여성 서사’를 넘어서, 아예 여성 작가가 주인공이 돼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공연들도 잇따르고 있다.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활발하게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젊은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의 ‘브론테’가 대표적이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버지니아 울프’(연출 홍승희 대본·작곡 권승연)도 주목할 만하다. 1942년의 작가 에들린 버지니아 스티븐(필명 버지니아 울프)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속 14년 전 런던에서 눈을 뜨며 시작되는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안한 선구적 작가이자 영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일컬어진다.
자기 소설 속 인물의 아들인 남자 조슈아는 가난한 실업자인 자신의 이야기를 바꿔달라고 말하지만, 에들린은 이 남자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이끌어 간다. 에들린은 노래한다. “나는 가장 나다운 곳으로 흐르고 있노라고, 쉼표도 마침표도 온전한 나의 의지로 찍었노라고, 홀로 나아가고 또 홀로 가라앉겠노라고.”
여성 작가가 공연의 화자로 직접 등장하는 건 여러 면에서 흥미롭다. 우선 남성 중심 사회의 억압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이 된다.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은 사회상은 그 자체로 웃음을 유발하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다.
◇고난 이겨낸 ‘홀로 서기’의 매력
또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작가로 자립하는 과정 자체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탁월한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창의적 아이디어만 있다면, 여성 작가가 주인공이기에 가능한 신선한 서사적 설정과 장치로 매력적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브론테’는 무대 장치를 과감한 각도와 색채의 조명과 조화롭게 사용한 사례. 하늘의 조각인 듯 무대 뒤쪽에 설치된 커다란 장치들은 브론테 자매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비추는 그림자극의 무대였다가, 자매가 기성 문단에 씹히고 뜯길 땐 문단의 늑대들을 비추는 스크린이 된다. 이 뜨거운 여성 작가들의 가슴속 불덩이였다가, 먼저 떠나는 자매들의 피안 가는 길을 비추는 초롱처럼 변화하는 작은 천장 조명의 사용도 뛰어나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주인공 작가는 자신의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실비아, 살다’(작·연출 조윤지, 작곡 김승민)에선 극단적 선택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던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게 미래의 자신이 찾아와 줄곧 곁을 지켰다. 유부남과 애정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 세계 최초의 SF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실제 이야기는 억압적 사회에 질식당할 지경인 여성 작가가 자신 안의 괴물을 꺼내는 과정으로 재구성된다. ‘메리 셸리’(연출 오루피나, 작·작사 박해림)에서 작가 주인공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 너머에는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女영웅담 ‘박씨전’ 소재 뮤지컬·연극도
여성 영웅 박씨 부인이 청나라에 복수하고 나라도 구하는 본격 여성 서사 소설 ‘박씨전’을 모티브로 한 공연 두 편이 잇따라 무대에 오른 것도 드문 일. 최근 공연을 마친 한국문화예술위 창작산실 지원작 ‘여기, 피화당’(연출 김은·한유주, 작·작사 김한솔)에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 살아 돌아왔지만 오히려 자결을 강요당했던 세 여인이 ‘피화당(避禍堂)’이라 이름 붙인 동굴에서 쓴 이야기가 저잣거리에서 큰 인기를 얻는다. 이곳에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멸시당한 부친의 억울함을 풀고자 선비가 글을 부탁하러 찾아온다. 지난해 공연한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연출 이인수, 작 진주)에선 아예 ‘박씨전’을 규방에 모인 여성들이 공동 창작으로 빚어낸다.
이전에도 주목받았던 여성 작가 주인공 공연들도 있었다. 차범석희곡상 뮤지컬 대본상 수상작인 뮤지컬 ‘레드북’은 남성 중심적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야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여자가 주인공. 올 초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이상한 나라의 아빠’에선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편의점 알바인 여대생이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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