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샤토라코스트에서 만난 진정한 예술

경기일보 2024. 5. 10. 03:01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룬 누리의 어머니 지구. 김남희 여행작가

 

4월 말, 남프랑스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는 한결 같았지만 가는 비가 자주 흩뿌렸다. 와이너리 샤토라코스트로 향한 그날도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샤토라코스트는 로제 와인이 주력인 와이너리다.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건 와인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다. 2001년 엑상프로방스를 즐겨 찾았던 아일랜드 출신의 건축 재벌 패디 매컬린이 1682년 세워진 오래된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와인만큼이나 예술을 사랑한다는 그는 60만평에 이르는 포도밭과 숲 곳곳에 조각작품을 하나씩 들여놓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①루이스 부르조아-웅크린 거미. ②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너머로 안도 다다오의 건물이 보인다. ③래리 뉴펠드의 Donegal. 김남희 여행작가

20년이 흐른 후 이곳은 이우환, 알렉산더 칼더, 숀 스컬리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45점에 이르는 조각작품과 프랭크 게리의 음악당, 안도 다다오의 아트센터와 채플, 장 누벨의 와인 저장고, 오스카 니마이어의 갤러리 등이 들어선 거대한 미술관이 됐다. 한마디로 현대미술과 건축, 와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 된 셈이다. 나도 ‘건축과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 찾아갔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워킹투어를 신청해 가이드와 함께 예술작품을 둘러보고 와인 시음을 하는 걸로 나들이 계획을 짰다. 프로방스 대부분의 마을처럼 이곳 역시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힘들어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의 높고 긴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교적 성소로 인도하는 듯한 계단을 올라가니 리셉션과 이어진 식당이었다.

잘 구워진 도미 요리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가이드 투어를 시작했다. 브라질, 영국, 스페인 등에서 모인 10여명이 가이드를 따라 두 시간의 산책에 나섰다. 러시아 출신의 젊은 가이드는 제일 먼저 인공 연못 위의 거미, 루이스 부르주아의 ‘웅크린 거미’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의 게이트 옆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브론즈로 만든 거대한 인체 상반신 조각이 서 있었다. 마침 이곳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특별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너른 포도밭 위에 놓인 우아한 곡선의 돌다리조차 래리 뉴펠드의 작품이었다. 일생을 통해 유지해야 하는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라질 조각가 통가의 작품은 자석 위에 관람객들이 올려놓고 간 동전으로 새로운 작품이 돼 가고 있었다.

리처드 로저스의 갤러리. 김남희 여행작가

완만한 오르막을 지나 다다른 곳은 붉은색과 흰색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파빌리온.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것 같은 이곳은 리처드 로저스(‘더현대 서울’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이다. 파빌리온 안에서는 살아 있는 나비의 날개를 사용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도쿄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구마 겐고의 조각, 안도 다다오의 예배당 등을 거쳐 다다른 곳은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가 102세에 설계한 갤러리. 부드럽게 펼쳐진 지붕의 곡선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렸다. 이 공간의 주인공도 데미안 허스트였다. 생존 작가 중 이 사람만큼 악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는 이가 또 있을까. 그는 ‘난파선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보물들’이라는 소설까지 썼는데 침몰한 선박 안에서 발굴된 일관성 없는 유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 소설에 기반한 조각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그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기발하고 엉뚱해 흥미로웠다. 가이드와 함께한 두 시간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투어가 끝난 후 혼자 포도밭 주변을 돌아다니며 투어에서 생략한 조각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와인숍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로제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오려니 우버가 한 대도 없었다. 이럴 때는 리셉션에 가서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하면 되지만 나는 운에 맡기고 약간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와이너리 안쪽에서 작은 차가 나오기에 손을 들어 세웠다. 아뿔싸, 운전사도 젊은 남성인데 옆자리에도 젊은 남성. 보통 이런 차는 타지 않는데 운전석에 앉은 친구의 인상이 좋은 데다 와이너리에서 나왔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샤토라코스트에 딸린 호텔의 식당에서 일하는 친구로 이름은 모아타미. 베르베르어로 ‘주체적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모로코의 사막 마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님과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프랑스로 일하러 온지는 4년째.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20분 동안 나는 그의 시간당 임금, 월수입, 월세, 장래 희망까지 다 알아버렸다.

“샤토는 시간당 11유로(1만6천원)를 줘서 임금이 후해요. 게다가 팁도 받을 수 있고. 근데 대중교통이 없어 너무 힘들죠. 처음 여기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 70유로를 벌어 택시비로 40유로를 썼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았어요. 인생에는 그런 시기도 있는 거니까요. 넘어지면 일어나는 법을 배우게 되잖아요. 처음엔 부엌에서 일했는데 좀 힘들고 지루했어요. 지금은 홀에서 서빙을 하게 돼 너무 즐거워요. 온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어 좋거든요. 나는 스페인어, 아랍어, 프랑스어, 베르베르어를 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돈을 벌고 싶어 스페인보다 임금이 높은 프랑스로 왔어요. 근데 이렇게 사는 삶이 재미있어 다음에는 영어도 배울겸 영어권 나라에 가서 일해볼 생각이에요. 다른 세상을 보고 싶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김남희 여행작가

스물한 살의 청년은 삶을 향한 열정과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느새 엑상프로방스에 들어섰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덕분에 즐겁고 안전하게 잘 왔어요.” “아니, 이게 뭐라고요. 도울 수 있을 때는 당연히 도와야죠.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도울 거고, 세상은 그렇게 좋아지는 거 아닌가요? 내 전화번호 적어 놓을래요? 여기 머무는 동안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연락해요.” 나는 그의 전화번호를 왓츠앱에 저장하고 차에서 내렸다.

샤토라코스트를 만든 패디 매컬린은 자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곳의 진짜 예술가는 포도 재배자입니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그 말을 살짝 바꾸고 싶었다. “이곳의 진짜 예술가는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샤토라코스트는 모아타미가 없었다 해도 아름다웠겠지만 그의 다정함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공간으로 남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뿐인 자신의 삶을 소재로 작품을 빚는 예술가다. 모아타미는 내게 인생이라는 작품을 빚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줬다.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