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사이’를 확장하면 ‘연대’가 된다[책과 삶]

박송이 기자 2024. 5. 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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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문학동네 | 336쪽 | 1만6800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김기태 작가. 문학동네 제공
원경과 근경의 괴리…혼란과 타협
평범한 이들의 ‘나아감’에 대하여
단편소설 9편에 이야기를 담아내
개인은 ‘구조에 포획된 존재’이며
끊임없이 고민을 하는 주체이기도

‘원경’과 ‘근경’, ‘줌인’과 ‘줌아웃’, ‘거시’와 ‘미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김기태 작가의 단편소설 9편을 묶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어딘가에서 마주쳤을 법한 혹은 우리 자신이기도 한 평범한 이들이 겪는 ‘원경’과 ‘근경’의 괴리, 이에 따른 혼란, 타협, 나아감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응당 좇아야 하는 윤리에서도 포착되고 사랑을 말할 때 나타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를 논할 때 두드러지는가 하면 계급 문제 속에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이때 개인은 풍경의 정물, 역사의 한 조각, 구조에 포획된 존재이면서도 끊임없이 윤리적 고민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리킨 테이블 위에는 주민들을 지지한다는 뜻으로 성명과 생년월일, 연락처를 적는 양식이 있었다. 요새 좀처럼 보기 힘든 방식이었다…그리고 비어 있는 칸들. 나는 선뜻 볼펜을 잡았다. 늙고 춥고 지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수록된 작품 ‘세상 모든 바다’의 한국계 일본인 하쿠는 케이팝 걸그룹 ‘세상 모든 바다(세모바)’의 팬이다. 그는 세모바 콘서트장 앞에서 만났던 중학생 영록이 사고로 사망한 후, 영록의 고향인 해진을 찾는다. 그곳에서 원전 건설 이행을 요구하는 주민을 만나고 영록의 말투와 닮았음을 떠올리며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서명을 하려는 순간, 일본인으로서 이 서명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을 하게 되고 뒤이어 또 다른 질문들을 떠올린다. “어느 쪽이든 그 서명은 분명한 이름을 요구했다. 한번 멈칫하니 서명 자체가 옳은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아주머니는 주민들을 얼마나 대표할까. 단지 보상금의 문제 아닐까. 그렇다고 원전을 또 지어도 될까. 이 개인정보가 악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대체 누구로서 무엇에 동의를 하려는 것일까.”

하쿠에게 세모바는 “거리낌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멤버 11명으로 결성된 세모바는 ‘아이돌’ 그 이상이었다. ‘타임’은 세모바를 “블랙핑크만큼 매혹적일 뿐 아니라 U2만큼 사회적인 그룹”으로 평했다. 6대륙 11곳의 해변을 담은 그들의 데뷔 뮤직비디오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럴 수 있다는 낙관이 넘실”거렸고, 국뽕을 넘어 “세계뽕 혹은 인류뽕”이 차올랐다. 세모바의 노래에 영감을 받은 팬들은 소셜미디어상에서 탈원전 캠페인을 벌였고 #Save_My_Bada라는 태그가 이어졌다.

그러나 세모바의 콘서트장 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한 대학동아리가 벌인 퍼포먼스가 테러로 오인되면서 세모바와 동일시했던 하쿠의 정체성과 윤리는 허물어진다. 퍼포먼스가 참사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영록이 사망하면서 하쿠는 영록의 사망에 자신의 책임이 있는 건 아닌지 고뇌한다. 한편 세모바 멤버 ‘송희’가 퍼포먼스를 벌이다 사망한 이들까지 끌어안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남기며 소셜미디어에서는 논쟁이 벌어진다.

“여러 논쟁이 세모바 자체를 초월해버리는 동안, 나는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느껴질 뿐이어서 의견을 가질 수가 없었다…이번에는 어디에 ‘좋아요’를 남기고 무엇을 리트윗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모바’를 통해서 볼 때는 선명하면서 단순했던 ‘인류애’는 영록의 죽음 후, 서명대에서 볼펜을 쥔 채 여러 질문을 떠올리게 할 만큼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느껴진다. 하쿠는 세상의 모든 바다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다소 무섭다”면서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고 말한다.

‘세상 모든 바다’는 자본과 미디어로 포장되고 소셜미디어로 전파되는 ‘윤리’가 평범한 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괴리되어 있는 지점을 다소 비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정반대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현재의 삶과 무관해보이는 역사적 사건과 이데올로기의 뿌리가 어떻게 변형되고 이어져 오늘날의 평범한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다소 희망적으로 드러낸다.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출발해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 한국의 외환위기까지의 역사를 빠르게 요약한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21세기 서울 동북부의 한 중학교. 그곳에는 ‘미납자’로 서로를 알고 있는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있다. 진주는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은 부모의 불화 속에 성장했고, 니콜라이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인종차별로 모스크바를 떠난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다. ‘미납자’로 서로를 인식했을 뿐, 대화조차 안 했던 이들은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잊는다. 그러다 성인이 된 후 각자 경기도 동남부의 한 도시로 독립하면서 재회하게 된다. 진주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4년제 대학 행정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니콜라이는 연소득 3800만원이라는 소득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귀화하지 못한 채, 여러 공장을 거쳐 자동차 전조등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구내식당 밥과 혼밥에 지친 둘은 2~3주에 한번씩 만나 솥뚜껑삼겹살, 감자탕, 즉석떡볶이, 코다리갈비찜 등을 함께 먹으며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모티콘으로 자주 소통하던 이들은 언제부턴가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이모티콘을 즐겨 쓰기 시작한다. 어느 주말 진주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방에 누워 있다고 답장했을 때, 니콜라이가 ‘이불을 덮은 개구리’ 대신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미지를 선택하면서다. 인터넷에 따르면 브레히트가 판사 앞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른 봉제공 엠마 리스를 기린 시에서 따온 짤이라고 한다. 그들의 검색어를 기억하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그들에게 ‘인터내셔널가’를 알려줬고, 이들은 함께 살 집으로 이사한 첫날 짐을 정리하며 유튜브가 추천한 4시간51분 분량의 95개국 ‘인터내셔널가’를 들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갑자기 이념을 좇고 계급의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저 또래의 젊은 세대처럼 그들 사이를 부부도 연인도 아닌 ‘친한 사이’로 장난스럽게 규정하며 ‘밈’으로 향유할 뿐이다. 이들은 연락이 두절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좋은 친한 사이 시도’라고 말하고, 아랫집의 외국인 노동자와 배드민턴을 치고나서는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친한친구 밈’은 이들의 삶에서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는 ‘지향’이 된다. 공장과 마트 입구에서 붉은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 아저씨가 나누어주는 전단을 받아와 함께 읽어보고 검색해보는 일도 그렇다.

‘친한 사이’는 부부나 가족처럼 안정적이지도 않고, ‘연인’처럼 낭만적이지도 않고, ‘동지’처럼 견고하지도 않다. 그러나 소설은 어쩌면 연약하기 그지 없는 ‘친한 사이’의 확장을 통해 연민과 연대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내보인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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